한국 현대사 짚어보기
몽양 여운형 선생과 고하 송진우 선생을 중심으로
1910년 경술국치로 한국의 주권이 침탈되고 그 날부터 한국은 식민지국가가 되었다. 길고 긴 세월 36년간의 뼈아픈 고통을 겪고, 일본의 제 2차 세계대전을 무조건 항복으로 마침표를 찍고, 우리 나라는 해방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송진우를 만나고자 하였다. 송진우의 사무실의 일련의 무리가 들어간지 한 시간쯤 지나서 그들이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고 나서 송진우는 급히 김성수를 만났다. 송진우는 총독부에서 보낸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김성수에게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낮에 총독부에서 사람들을 보냈었네..”
송진우
송진우·현상윤은 감옥에서 나왔으나(1920.10.30), 육당은 아직도 가출옥(1921.10.18) 전이었다. 더구나 춘원이 체포되지도 않은 자유로운 몸이라는 점은 많은 사람들의 의혹을 자아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변절자 춘원’이라는 소문이 날 만도 했던 것이다. 게다가 허영숙의 상해 방문 직후였기에 여자냐
송진우를 불러 치안유지의 책임을 맡긴다. 이들은 조금씩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었는데 여운형은 강경한 민족주의자로 분류된다. 저자들은 그를 한국과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긴밀한 협조를 이어왔지만 그들 기관의 중앙에는 설 수 없었던 좌익 민족주의자라고 설명한다.
송진우는 가장 온건한
송진우, 안재홍등과 교섭을 한다. 여운형은 총독부와의 교섭을 통해 치안유지권 이상의 정권이양을 위한 5개조항을 걸고 , 총독부는 소련의 진주설과 맞물려 좌파적 성향의 여운형의 협조가 필요함에따라 협상제안을 받아들인다.
8월 15일 여운형은 안재홍, 정백세력과 더불어 주측이 되어 공산주의자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2
① 강독한 저작의 주요 내용 및 논지 요약
제 4 장 미 군정기의 한국 공산주의
일본이 패망 후 국내 치안유지의 책임을 당시 정치적 경험이 풍부하고 명망이 높았던 여운형, 안재홍, 송진우 이 세 사람에게 맡게 된다. 이 중 강경한 민족주의자였던 여운형은 공산주의운동과 밀접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2: 해방 후 편,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내용의 요약
제 4장 미군정기의 한국 공산주의
1945.8월14일 자정 식민당국의 군,관 최고 책임자들은 천황의 항복을 들었다. 즉시, 정무총감과 그의 고문들은 서울에 있는 저명한 한국 민족주의자-여운형, 안재홍, 송진우-를 택해 치안유
송진우, 여운형 2인에게 조선총독부로부터 정부의 이양을 권유받고 송진우는 거절을 여운형은 허락하면서 조선총독부에 5가지의 조건을 걸었다.
① 전조선의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② 조선의 수도인 경성에 3개월분의 식량을 확보할 것.
③ 치안의 유지와 건설사업에 아무런 간섭하지
송진우(宋鎭禹)에게 위임시키고자 하였으나 송진우는 한국에 연합군이 진주하면 일본군은 무장을 해제하고 한국은 임시정부가 들어와 정권을 담당하여야 한다고 이를 거부하자 그들은 8월15일 오전중에 여운형(呂運亨)에게 동일한 내용을 요청한 결과 그가 수락함으로 일본인들은 그이 요구를 들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