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머리말
내가 의자왕이라는 백제의 마지막 왕을 선택하게 된 것은 황산벌이라는 영화를 감상하면서 이다. 황산벌전투를 생각하면 김유신, 계백을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나는 그것을 보면서 백제의 멸망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마지막왕은 어떠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알아 보게 되었다. 마
성충을 상좌평으로 등용하였다.
이듬해 과연 성충의 예언대로 신라가 백제를 침공하게 되고 이에 성충의 지략대로 공략함으로서 신라군을 처부수고 대야주의 40여성과 고을을 차지하고, 김춘추의 딸 부부를 살해하였다.
이즈음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정권을 잡게 되는데 이때의 국제
좌평성충이 극력 말렸더니 왕이 성을 내며 그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의자왕은 충신의 충언도 듣지 않는 등 국정 을 도외시한 채 음란과 향락에 빠져 지내는 인물로 묘사, 이런 실정으로 백제가 멸망하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의
좌평성충은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였다가 옥사하였고, 계백은 5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백제의 사직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이지만 ‘부왕모후’를 성심껏 섬기고 형제끼리 우애가 있어 그를 ‘해동증자’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이러한 유교이념은 정치운영에도 반영되
성충을 죽이고 흥수를 귀양보냈다”라 서술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충신을 죽이고 간신을 가까이 했기 때문에 백제가 너무 허망하게 망해버렸다”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1호 매국노라고 불리는 ‘예식진’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여론이 뒤집히기 시작하였다. 물론,
좌평이었고, 아신왕 시기에 左將 眞武가 國舅로서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점 점으로 볼때 왕비족 진씨의 역할이 증대되었고 점차 왕권이 쇠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여겨진다.
ㆍ아신왕(392~405)
진사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아신왕은 시조묘인 동명묘에 배알하고, 범부여족사회의 전통적 의례인 祭
이를 만회하기 위해 신라정벌에 나섰다가 554 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고 백제군도 대패했다. 이후 백제는 대성팔족(大姓八族) 이라는 귀족의 연합체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고, 이것이 6 좌평제로 왕명의 출납 · 재정 · 의례 · 왕궁숙위 · 형옥 · 병마관계 사무를 관장한 최고 귀족회의체였다.
Ⅰ. 들어가며
백제의 중앙통치조직은 중앙귀족화 된 각 소국의 수장세력들을 중심으로 관등제, 관부․관직제, 귀족회의체 이 3조직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백제의 지방조직과 군사조직 또한 중앙집권화를 거쳐 정비되었다. 백제는 3번에 걸쳐 도읍지를 옮기는데 그에 따라 정치적․사회적 변
1. 개요
신라의 삼국통일은 676년,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한 후, 한반도에 야심을 드러낸 당나라군을 대동강 북쪽으로 축출하여 한반도를 통합한 사건을 말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6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6세기 무렵, 한반도 남부는 고구려를 포함하여 백제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