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어라 하고 오늘날 남북한 언어를 반도언어라 칭했으며 일본어는 한국어의 일종이므로 즉 한고어의 일종이므로 열도한어라 부르기로 하였다. 선조인 반도한인과 열도한인들은 공통 한고어(韓古語) 즉, 대륙언어로 의사소통해왔고, 반도한어(半島韓語)의 화자들이 일본 열도로 이주하면서 열도한어(
4. 연암의 문학관
박지원은 그의 한문 단편의 내용 속에, 또는 작품의 내용 앞, 뒤에 작품을 쓰게 된 동기 및 배경, 소재원(素材源) 을 몇 작품에서 밝히고 있다. 그것을 통해 살펴 본 연암의 문학관은 다음과 같다.
1) 眞문학론
연암은 ‘잡을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 나비는 그만 훨훨 날아가 버린다
1. 일제 강점 시 시대의 국어 역사 연구
국어학사는 ‘국어학’이라는 특정 영역의 발전 역사를 체계적으로 밝히는 학문이며, 연구 대상은 학문으로서의 ‘국어에 대한 연구’이다. 연구 업적에 대한 배열 방법 또한 시대순과 역순으로 나뉘는데, 지금부터 나는 일제 강점기라는 특정 기간을 연구대상
Ⅰ. 서론
천주교회의 복지활동은, 지속적인 연구와 조사 사업은 사회변화에 따른 욕구변화나 인식의 변화를 신속히 조사하여 그에 따르는 해결책이나 예방책을 보다 적절히 개발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교회내 연구기관과 현장이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고 더 향상된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
2. 충청남도 지역 개관과 방언
2.1. 충청남도의 역사
충청남도가 삼한 시대에는 마한에, 삼국 시대에는 백제에 소속되었다. 특히 이 지역의 공주는 백제의 제22대 문주왕 1년(475)부터 제26대 성왕 16년(538)까지(부여로 천도하기까지) 약 63년 동안 백제의 도읍이고, 부여는 공주에서 부여로 도읍을 옮긴 이
1. 근현대 민족ㆍ민주운동과 호남의 위상
1-1. 일제 강점기 호남에서의 민중운동
정순제,「호남종횡관(湖南縱橫觀)」: “전남은 과거 갑오운동과 현금의 농민운동의 진원지로서 무산의 소작인들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부터 약자의 무기는 오직 단결뿐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면 단위로 노동단체를
선생의 나이 13세(고종 25, 서기 1888년) 되던 봄에, 서울서 처가 (안동 권씨 댁) 살이하던 큰아버지되는 학만 씨가 시골선생댁에 와서 형제분이 의논한 결과, 선생을 양자로 정하여 서울로 데리고 올라오게 되었다. 학만씨는 두 아들과 한 딸을 두었었으나 괴질로 다 잃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의 큰 아버지,
한어(韓語)통역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그 뒤 《국민신보(國民新報)》의 주필과 《만세보》의 주필을 지냈다.
이인직이 작가로서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만세보》에 『혈의 누』를 연재하면서 부터이다. 또 190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극장인 원각사(圓覺社)를 세워 자신의 신소설 『은세
문전(大韓文典)』, 주시경의 『대한국어문법(大韓國語文法)』, 『국어문법』, 『말의 소리』 등과 같은 저술이 나오고 1907년 국문연구소를 개설하여 국가적으로 국문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국어국문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한 주시경은 국문의 전용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국문의 독자성, 대중성
문전(大韓文典)》을 간행하였다. 저서에는 《서유견문》 《구당시초(矩堂詩抄)》 《노동야학독본》 등이 있다.
2. 서유견문
조선 말 정치가 유길준(兪吉濬)이 쓴 유럽·미국 기행문. 1895년(고종 32) 도쿄[東京] 교순사(交詢社)에서 간행하였다. 1881년(고종 18)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게 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