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은 노년에 접어들어 양귀비에 빠져 정치를 등한시하였으며, 안·사의 난의 발발로 당은 더욱 쇠퇴의 길을 걷는다.
이 글에서는 현명한 치세로 당을 황금기로 이끌어 가던 현종의 업적과 후에 양귀비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던 그의 실정에 대해 알아보고, 더불어 안·사의 난을 통해 당시 동아시아
현종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 때 명문귀족 출신인 재상 이림보는 정치에 싫증이 난 현종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당대 최고의 권신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는 국내 귀족 세력의 반대를 견제하기 위해 이민족이나 서민 출신을 절도사로 임명했다. 이에 안록산은 이림보의 지원 속에 평로(동북지방),
현종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다시 안록산에게 하동(河東) 절도사를 겸하게 하였다. 현종은 장안에 호화로운 주택을 지어 안록산에게 주는 등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록산이 모반을 일으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었다. 현종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고도 처음에
현종은 강감찬을 총지휘관인 상원수로써,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았다. 현종은 이사람들에게 약 20만 8천 3백의 병력을 주며, 거느리고 가 거란병을 막게끔 했다.
고려 침입을 했던 거란에서의 군사들이 흥화진에 이르게 되자, 강감찬은 기병 1만 2천 명을 선발을 하여 산중에 매복을 시키고 소가죽을 엮어
현종은 그곳에 나타나 금비녀와 보석상자를 정표로 주고, 오동나무 밑으로 가서 사랑을 맹서한다. 제 2절에서는 현종이 침향정(沈香亭) 가에서 잔치를 베풀고 양귀비에게 예상우의무(霓裳羽衣舞)를 추게 한다. 그리고 현종은 흥이 나자 젓가락으로 오동나무를 치며 장단을 맞추는데, 갑자기 안록산(安
현종은 실력자 태평공주를 제거하고 타고난 총명과 정성으로 힘써 정부를 돌봐 '개원의 치'라고 불리는 번영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즐겨 시를 짓고 서역의 음악까지 흡수하여 음악을 작곡하는 등 에술적 감각과 재능 또한 뛰어났던 현종은 점차 정치에 싫증이 났다. 그는 명문 구귀족 출신인 이임보에
현종은 병사들의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양귀비의 일족은 병사들에게 내어주어 주살하게 했고 사랑해 마지않던 총비 양귀비는 내팽개쳤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하다고 했던 양귀비가 환관 고력사의 손에 이끌려 죽으러 가는 것을 그저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양귀비
현종은 서포의 말이 당파에 치우친 언사라고 꾸짖는데 서포는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똑같은 주장을 한다. 이에 현종은 진노하여 서포를 금성으로 정배(定配)하게 한다. 배소에서 풀려나온 서포는 숙종조에는 강직한 성품과 과격한 언사로 숙종의 비위를 거슬러 관직을 삭탈 당하기도 했으며 51세에는
현종은 초년에 고초를 겪어 세태와 民情에 두루 통하였다. 현종(1010∼1031) 몸소 근검 보여 즉위의례 함께 정화조처 시행하였다. 현종은 순행하여 직접 減稅조처와 免役조처 내리고 赦免조처 죄인을 풀어주어 노동력에 복귀하게 하였다. 특히 연등회·팔관재는 왕의 즉위 후 일종의 국가통합축제로서 기
현종은 크게 감동하여 741년 고선지에게 안서도호부의 부도호 겸 안서 4진 4진은 안서도호부의 예하기관으로 당의 서역통치를 위해 설치한 도독부로서 현자 카라샤르, 쿠차, 카슈칼, 코탄을 일컫음 양대규, 고선지장군 서역대원정 연구 (대륙연구소, 1995)
의 도지병마사라는 높은 관직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