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3번 성취형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인정의 틀 속에서 성과나 성공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유형이다. 우리는 성공을 얻음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가 이룬 성과에 대해 사람들이 높게 평가할 때 비로소 이 세상에 태어나 헛되이 산 것이
홍국영 등의 도움으로 여러 차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1776년 3월에 영조가 죽자, 마침내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즉위하면서 어머니 혜빈(惠嬪)을 혜경궁으로 높이는 한편, 생부인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높이면서 묘소를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관련유적
홍국영을 도승지로 임명하고, 숙위소 대장도 겸하게 하여 측근으로 크게 신임하였다. 그러나 홍국영이 1779년에 누이 원빈(元嬪)이 갑자기 죽은 후 권력 유지에 급급하여 종통을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여 그를 내쫓고 정사를 직접 주재하기 시작했다.
그 후 재위 5년째인 1781년, 규장각을 문형(文衡)의 상
홍국영한테 밉보여 그의 박해로 그곳에 피난 가서 숨어 살았다. 이 때 부터 연암이란 호를 쓰기 시작했다. 1779년 43세에는 북학파이던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와 규장각의 검서관이 되어 ‘4검서관’의 명성을 들었다. 다음 해인 1780년 2월 홍국영이 실각 후 4월에 사약을 받아 죽게 되자 연암은 다행히 서
홍국영이 세도를 잡고 벽파(僻派)를 박해하자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황해도 금천(金川)에 있는 연암협(燕巖峽)으로 피신하여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연암이란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에서 2년쯤 지내다가 정조 4년(1780)년, 홍국영이 정권에서 물러나자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오게
홍국영이 세도를 잡던 시기라 벽파인 그의 생활이 어렵게 되어 결국 황해도 금천 연암골짜기로 은거하여 농사와 목축에 대한 정리를 하게 된다.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려진 것도 이에 연유한다.년후 홍국영이 물러나자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와 있다가 그 해(1780- 정조4년)에 삼종형 박명원의 권유
홍국영의 비위를 거슬러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어 결국 황해도 금천의 골짜기인 연암골에 은거하는 신세가 된다.(연암이라는 호는 당시 은거하던 곳의 지명을 딴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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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양반전의 등장인물들 살펴보며 느낀 점.
양반전에는 2명의 양반과 평민인 부자 그리고 가난한 정선양반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을 하게 된다. 그후, 랴오둥[遼東]·러허[熱河]·베이징[北京] 등지
홍국영에 의해 밀려났으나 후에 송화 현감, 사옹원 주부, 온릉령 청산 현감 등의 한직을 지냈다. 그러나 부귀영화에 뜻을 두지 않고 일생을 자기 수양에 힘쓰며 형 임성주의 학풍을 이어 주기설을 확립했다. 문집인 『운호집』6권 3책이 전하고 있다. 이영춘『임윤지당- 국역 윤지당 유고』해안 1998 33p~38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잡아 벽파(僻派)였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결국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했는데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리게 된 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는 이곳에 있는 동안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였다. 1780년(정조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