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다 하여 포로송환이 그 목적이 그 뜻인 ‘회답사’ 라는 명칭으로 바꾸고 포로를 송환했으며, 사명대사와 송은대사는 ‘탐적사’ 란 이름으로 일본을 살피고 온 유례가 있다. 일본의 목적은 새로운 정부의 정당성 인정 요구가 그 이유였다.
2. 경 로
전기
후기
조선
한양까지
동래까지
일본
도쿄까지
1.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 사람들이 갖게 된 명과 일본에 대한 인식을 비교하고, 조선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게 된 배경에 대해 정리해 보시오.
1) 명에 대한 인식
명에 대한 인식은 좋고 나쁨, 2가지로 나뉜다. 명에 대한 인식이 나쁜 사람들은 임진왜란 초기 제대로 통제되지 못하던 명군에게 방화,
광해군의 중립외교
< 요 점 >
광해군이 실행한 중립외교
광해군은 왜 평과 절하되었는가?
*
오늘 이 시간 광해군은 왜 평가절하되어야만 했는지 그리고 광해군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상황 속에서 조선을 지키기 위해 실행한 중립외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광해군 묘
광해군의 ‘묘’ 이다. 다
조선시대에 왕으로 즉위했으나 군(君)으로 강등된 임금은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 이들 셋이었다. 이중 노산군은 후에 숙종에 의해 단종으로 복위가 되었지만 연산군과 광해군은 끝내 `군`으로 남았다. 역사상 폭군으로 일컬어지는 광해군, 그는 정말 『광해군일기』에 기록되어 내용처럼 폭군의 모습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쳐 동아시아의 정세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명과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주변을 돌아볼 여력이 없을 때, 滿洲에서는 누르하치(奴兒赤; 1559~1626)가 여진족을 어울러 후금국을 건설함으로써, 명청 교체의 터전이 마련된 것이다.
누르하치는 성시를 수축하고 관
‘조선통신사’는 조선시대 일본으로 보낸 외교 사절단으로 여기서 ‘통신’이란, 두 나라가 서로 신의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의미이다.
1401(태종 4)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린관계가 성립, 조선이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고 이듬해 일본의 아시카가 정권도 책봉을 받아 조선·중국·일본 간에 사대교린
1. 생활
-일본인은 자신의 생활에 만족한다?
1997년 총리부의 국민생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대체로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의 66.5% 즉 약 2/3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구 소비재, 주택, 레저 여가생활에 대해서는 만족하고 있는 편이며 자산, 저
《임진록》은 작자와 연대를 알 수 없는 고전 소설이다. 인조대 이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문본과 국문본을 합쳐 이본이 40여 종에 이르고, 이본마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내용에 약간씩 차이가 난다. 이처럼 이본이 많고 내용도 조금씩 다른 것은 《임진록》이 당대 사람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
(1). 산업공동화의 정의
공동화(空洞化)는 일본에서 주로 제기되어 왔던 개념이다. 구미 각 국에도 공동화 (Hollowing-out) 라는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탈공업화 라는 개념이 보다 보편화되고 있다. 와세다 대학의 고바야시 교수에 따르면 공동화는 다음과 같이 정의되고 있다. 산업공동화는 국제경
I. 일본 근세의 시작
1. 서양 정세
16 세기 후반 세계사에 있어서의 패권 교대를 상징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588년 7월 31일 아르마다(무적함대)의 해전에서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 해군이, 최강 무적 스페인 해군을 격파했다. 태양이 가라앉지 않는 제국이라고까지 말해진 스페인은, 이것을 기점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