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 숙명전환의 선물을 읽고 - 사회조사실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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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 숙명전환의 선물을 읽고 - 사회조사실습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을 읽고
사회조사실습
이 책을 읽으며 창가학회라는 일본의 종교에 많은 궁금증이 생겼었다. 창가학회는 불교 교단인 일련정종의 신도 단체로 출발하였고 법화경을 근본으로 13세기 일본의 승려인 니치렌이 만든 만다라를 본존으로 섬기며 개인의 행복과 각국의 번영을 추구함과 아울러 세계의 평화, 문화, 교육을 증진시키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창가학회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많아 일반인들에게는 ‘남묘호렌교’,‘남녀호랑이교’등의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상한 종교’, ‘유사 종교’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또한 처음으로 들어본 종교였으며 이 책을 읽으며 많은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창가학회는 일본의 신종교이며 신도의 수가 3번째로 많은 만큼 영향력 있는 종교다. 창가학회는 1945년 패전 이후 일본 사회에서 선교와 포교를 통해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한 종교였고, 주로 도시 하층민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창가학회는 이러한 급성장을 통해 사회적인 비난도 거셌다. 창가학회의 가장 기본적인 의례는 ‘근행’과 ‘창제’다. 그리고 창가학회는 중세의 불교 사찰과 사원은 가족단위 그리고 지역 공동체 단위로 얽혀 지역 주민가 상호의존 관계를 맺은 채 유지되고 있었다. 반면 창가학회 조직은 교리를 받아들인 개인,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새로운 조직이다. 조직 구성은 피라미드 형태의 종적 조직이 중심이었지만 점차 지역 단위의 횡적 조직으로 바뀌었다. 종적 조직은 조직의 결합 정도가 매우 높지만 사람들이 지리적으로 멀리 흩어져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려움이 많아 횡적 조직으로 여러 해에 걸쳐 기본 방침을 개편하는 작업을 진행한 결과였다. 창가학회 신도들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대부분의 신도가 창가학회의 잘 짜인 틀 안에서 일정한 위치를 부여받고, 그 위치에 맞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창가학회 본부 직원이나 회관 관리 직원을 제외하면 모두 급료를 받지 않는 무보수 활동을 한다. 또 여성 신도들은 창가학회의 공식 기간지인 을 정기적으로 돌리고 있다. 창기학회의 회원들도 헌금을 한다. 그것을 재무라고 하며 날짜를 정해 1년에 1회만 헌금한다. 창가학회는 일본 내 다른 종교단체들과 달리 공명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성공적으로 의회에 진출했고, 오랫동안 제 3당으로서 자기 위치를 확실하게 다졌을 뿐만 아니라, 지난 시간동안 자민당의 제안을 받아들여 연립여당으로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 또한 창가학회 회원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국회에서 외국인, 특히 재일한국인의 참정권에 관한 법률개정안을 가장 적극적으로 발의, 추진하는 정당은 공명당이다. 하지만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주는 법안이 통과 된 적은 없다. 오히려 공명당의 노력이 부족한 것이 아닌 집권 여당인 자민당과 골수 우익의 탓이라 여기며 공명당을 믿고 지지한다. 이러한 책의 내용을 보며 생각한건 과연 왜 수많은 재일한국인이 창가학회의 신도가 될 수밖에 없는 많은 조건들이 충족되어 진다고 보인다.
재일한국인은 과거 일본 제국의 영역에서 강제로 편입된 조산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 생활하면서 형성된 집단이다. 일본에서 산업화가 진행되던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해방 이전까지는 조선의 하층민이 주로 일본에 건너갔다.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일본 땅에 남아 있던 조선인들은 60만 명이 넘었다. 그들은 대부분 조국의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으나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해방 직후 한반도로 귀환의 물결은 곧 바뀌었다. 한국 사회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한국 전쟁까지 그러나 이들은 일본 정부에 의해 입국을 거부당하고 일본 땅에 남아 있던 조선인들의 일본 국적을 박탈하였다. 그러고는 이들은 모두 외국인으로 등록하였다. 이 때문에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밀항이라는 불법적인 이동 경로가 많이 이용되었다. 그렇게 어렵게 다시 찾은 일본에서의 삶도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한 때 식민지였던 한국인을 일본인들이 곱게 바라보진 않았을 것이다. ‘조센진’이라는 차별의 이름을 가지며 살아왔고 교육의 어려움도 당연하다. 제대로 된 교육시설에 교육을 받기 힘들었을 것이며 그나마 북에서 조선학교를 만들어 교육을 하였지만 그마저도 일본과 북의 교류가 없어 힘들어 졌다. 이런 상황들로 2세대들은 제대로 된 한국어 교육을 받지 못하였고 한국어를 사용할 일도 점차 사라져갔다. 또한 귀화의 어려움까지 있었다. 일본은 ‘단일민족국가론’을 내세우며 모든 ‘일본인’은 천황가를 중심으로 혈연관계로 맺어진 ‘가족구성원’으로 이해된다는 보수적인 논리가 있었다. 그러한 논리와 여러 가지 상황들로 귀화를 거부해왔다. 하지만 일본에서 살기 위해서 귀화가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들을 겪으며 재일한국인들의 일본에서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재일한국인 1세대들과 달리 2,3세대들은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가 고국을 그리며 고향에 돌아갈 날을 꿈꾸던 때의 감성으로 한국을 생각 하지 않으며 그들이 살아가야하는 땅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인 것이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창가학회에 처음 입신한 재일한국인들은 대부분 가난과 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앙생활을 시작하였고, 재일한국인 대다수가 일본 도시 직역 변두에 거주하는 하층민이었고, 급료가 높은 직장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식민지 조선 출신이라는 사회적 차별을 받았다. 하지만 처음 대부분의 재일한국인은 창가학회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한국인으로서 일본인의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막연한 거부감과 일본 사회 내에서 창가학회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의 영향이었다. 처음부터 창가학회에 긍정적인 입장으로 다가간 재일한국인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재 많은 재일한국인이 창가학회의 신도로 자리 잡고 있다.
한반도에서 태어나 한국인으로 살던 그들에게 더 이상 고국으로 귀향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지고 일본 땅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재일한국인들에게는 과연 자신의 나라는 어디일까? 정체성의 혼란과 쉽지 않은 일본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의 전략은 창가학회였다.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어느 한쪽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재일한국인에게는 창가학회라는 종교는 소속감을 주며 그 안에 소속되어 보호받으며 따뜻함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창가학회는 그런 재일한국인을 따뜻하게 받아주었으며 많은 활동을 통해 재일한국인을 차별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재일한국인은 더욱 굳건히 신앙심을 지키며 절복활동에도 더 힘썼을 것이다. 이렇게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은 서로 상호관계를 유지하며 지금까지도 많은 재일한국인의 신도를 유지 하고 있다. 아마 창가학회에 속해 있는 재일한국인 많은 신도들은 아마 이러한 모습들에 의해 창가학회가 나라가 되어주고 가족이 되며 재일한국인에게 힘이 되 주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교단 활동은 곧 일본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고 난 후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 둘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창가학회라는 종교가 과연 재일한국인의 진정한 안식처였을까? 라는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지만 구술자들의 인터뷰에는 창가학회에 대한 의심이 보이지 않았다. ‘숙명전환의 선물’에서 인터뷰 녹취록을 통한 그들의 삶의 이야기에서 그들에게 창가학회는 종교 보다 더 큰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밀항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온 구술자,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조센진’이라는 차별의 이름을 들으며 소년기를 보낸 구술자, 그 외에도 많은 구술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언어의 장벽이 있는 상황에서도 구술자들이 한 말을 생생하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터뷰에서 창가학회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는 창가학회를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 것 같고, 독자들에게도 약간은 진실적으로 다가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창가학회는 일본의 타 종교에 비해 재일한국인이 다가갈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재일한국인으로 지내오며 느꼈던 수많은 감정들과 창가학회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