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중운동과 기독교사] 일제하 계몽운동

 1  [한국민중운동과 기독교사] 일제하 계몽운동-1
 2  [한국민중운동과 기독교사] 일제하 계몽운동-2
 3  [한국민중운동과 기독교사] 일제하 계몽운동-3
 4  [한국민중운동과 기독교사] 일제하 계몽운동-4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한국민중운동과 기독교사] 일제하 계몽운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일제하 계몽운동
1. 머리말
일제강점기에 일어났던 자강운동에 대해 기술한다. 어떤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어떻게 발전해 나아갔는지, 그 한계는 무엇이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2. 자강운동의 배경과 발전
한말 자강운동론이 본격 대두하기 시작한 계기를 만든 것은 ‘을사조약’의 체결이었다. 1905~10년 사이 자강운동론이 대두하게 된 정치사상적 배경으로서는 사회진화론의 수용과 개화 자강론의 확산이라는 사상적 동향, 일제의 한국 보호국화라는 정치적 변동 등을 들 수 있다. 자강운동의 기본적 주장은 세계를 생존경쟁의 시대로 인식하고, 이 경쟁에서 살아남는 길은 자강운동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경쟁시대에서의 실력양성, 자강운동을 강조하면서 실력을 기른다면 국권회복의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었다. 즉, ‘선(先)자강운동 후(後)독립’을 주장했다. 자강운동론이 일반 사회에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은 1905년경부터였지만, 지식인들 사이에서 폭넓게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897~98년 독립협회운동이 있었던 시기부터였다.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이나 『대조선독립협회보』를 통하여 자강만이 독립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그 자강은 개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그 개화자강의 구체적 방법으로서 독립협회가 가장 중시한 것은 입헌정체의 성립, 신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등이었다. 또 신교육을 통해 민중이 계발되고 신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자강 실현의 지름길이라고 보고, 학교의 설립, ‘실상학문(實相學問)’의 교육, 서적 출판의 장려, 외국으로부터의 선전과학기술과 신지식의 도입 등을 주장하였다. 독립협회는 산업개발을 위해 지주자본이 적극적으로 공업ㆍ광업 등에 투자되어야 한다고 주장, 기본적으로 ‘위로부터의 자본주의화’를 지향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산업 개발론에는 지주제의 혁파 등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은 나타나지 않았고, 상업 진흥론에서도 자유무역주의의 이상론을 주장하는 등 국내 상업보호에 대한 이론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는 등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다.
한말 자강운동 단체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신민회였다. 신민회의 운동은 크게 두 계열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실력양성을 말하면서도 국권회복을 위하여 실력양성보다는 국민에 대한 국가의식, 국혼의 고취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애국심을 강조하면서도 신교육의 보급과 산업의 진흥을 통한 실력양성, 그리고 근대적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민족성의 개조를 더 중시하는 경우이다. 당시 대체로 보아 대한매일신보계와 상동청년학원계, 그리고 무관출신 인사들은 전자의 입장에 있었고, 서북지방의 실업가ㆍ계몽운동가들은 대체로 후자의 입장에 있었다. 전자의 입장은 당시 대한매일신보계의 자강운동론자들에 의해 대체로 대변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계는 다른 계열의 자강론과는 달리 자력을 기르는 데 타력의 원조는 필요치 않으며, 오히려 해가 될 뿐이라고 인식했다. 이를 ‘자주적 실력양성운동론’이라한다. 박찬승;『한국근대 정치사상사 연구』(역사비평사,1992), p.220~225
3. 농촌계몽운동의 배경과 발전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한국인에게 외견상 자유를 허용하는 듯 꾸미면서, 내적으론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고 민족 경제를 파탄시키며, 3.1운동 때 결성되었던 범민족운동 세력을 와해시키는 작업을 추진했다. 장규식; 『일제하 한국 기독교 민족주의 연구』(혜안,2001), p.323~4
3.1 운동 이후 기독교의 대표적인 신앙 양태를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가 초월적 신비주의 신앙운동이고, 둘째가 현실적 계몽주의 신앙운동이다. 전자는 김익두·길선주·이용도 등 주로 부흥운동가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교회내의 민중성향을 지닌 교인들이 주체를 이루었다. 기적과 이적을 동반한 열광적 부흥운동은 3.1운동 이후 패배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창출된 신앙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와는 다른 방향인 계몽주의 신앙 양태는 3.1운동을 체험한 기독교 지성인 및 지도자급 인사들 중 상당수는 3.1운동 실패의 원인을 민족의 독립역량 부족으로 인식하고 적극적인 항일투쟁보다는 민족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역량을 향상시킨다는 취지하에 계몽주의 노선을 택하였다. ‘민족개조론’ 입장에서 교육·문화·사회 계몽운동을 추진하였으니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기독교 정신으로 민족과 나라를 ‘개조’한다는 것이었다. 1920~30년대 기독교에서 농촌계몽운동, 문맹퇴치운동. 절제운동, 야학운동 등을 적극 추진하게 되는 이론적 근거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 기독교의 역사Ⅱ』(기독교문사,1990), p.41
(이 때 일제의 후(後)발적 전근대설을 통한 한국 사회의 식민지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새로운 성찰 세력으로 등장한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주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부정하며 반제·반봉건 민중혁명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당시 한국 민족운동의 이데올로기적 분열 상황에서 이를 통합할 제 3의 대안을 찾지 못하고 농촌계몽사업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자본주의적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한 개량적 노선만을 고수하였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