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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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신앙고백의 중요성
- 한국 교회의 역사 중 일제 강점기간 동안 한국 교회의 신앙적 대처를 고찰하고 신앙적으로 재무장함에 있어 신앙고백의 필요성과 신조 교육의 당위성과 중요성에 관하여-
Ⅰ.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섭리를 얘기할 때 대표적인 예를 말하라면 대한민국을 향한 그 분의 일하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많은 선교사들이 순교 하였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나라를 빼앗겨 고통 중에 있을 때에 순교자들의 피로 전해진 복음이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만들었다. 그 후 광복을 맞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6.25 남·북 전쟁이 발발하였다. 몇몇 이데올로기들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던 노력들은 끝내 참담한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많은 이들은 이러한 역사를 보고 나라의 존속이 이어지는 것 만해도 기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존속하는 것에 그치지 않으시고 복음을 통하여 구원 받는 백성들이 많아질 수 있도록 끝까지 일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일하신다.
나는 이러한 강압적이고 살벌한 역사 속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은 교리 공부와 같은 체계적인 신앙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진 고난과 역경 가운데 믿음을 잃지 않았다. 사실 그들에겐 지금과 같은 신학적인 지식도, 성경이 쓰여 진 원어의 뜻을 알 수 있는 자료도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죽음을 이겼을까? 나는 그들이 가진 신앙의 힘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궁금했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보고 그 역사 속에 나타난 고난과 고통을 감수한 신앙의 선배들의 신앙고백이 정확하고 명료한지 알아 볼 것이다. 그리고 흙탕물처럼 탁해진 물속에서 진리를 찾는 이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할 신앙고백과 바른 신앙고백에 필요한 신조 교육의 당위성을 알아보려 한다.
Ⅱ. 한국 교회의 역사에 대해여 서정민, 한국교회의 역사, 살림지식총서, (서울: 실림, 2003), 041
1832년 독일계 유태인 목사인 칼 귀츨라프가 영국 사선 로드 암허스트 호를 타고 충청도 홍주 고대도 앞바다에 정박했지만 한국 정부에 거절당하였다. 그 후 1866년 우리가 잘 아는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제너럴 셔먼 호를 타고 대동강을 통해 평양에 진입하였다. 하지만 한국 땅을 밟기도 전에 처형당하고 말았다. 1870년대 말, 스코틀랜드 장로교 만주선교사들인 로스(J.Ross)와 매킨타이어(J.Macintyre)의 만주지역에서의 한국 선교활동으로 한국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들은 이 활동 중 만주지역에서 중국 상인들과 무역 중이었던 서상륜이라는 사람을 만났고, 서상륜은 이 번역 활동에 동참하여 한글 쪽복음서를 차례로 간행하게 되었다. 이 후 서상륜은 한글 쪽복음서를 들고 본국으로 돌아가 최초의 자생적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설립하며, 열심히 전도에 임하였다. 같은 시기 미국의 장로교, 감리교 선교부는 한국선교를 결정하고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톤 등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들을 통해 학교, 병원, 교회 등이 세워졌고, 적극적이고 보다 폭넓은 복음 전도 사역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시대적으로 대한민국은 일제의 계속되는 침략과 탄압으로 인해 나라를 빼앗기는 국면에 처하였다. 이에 1919년 3.1 운동을 비롯한 독립 운동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세하였고 민족의 지도자의 자리에서 목숨을 바쳐 섬겼다.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도 1920년대에 서울 남산에 건립된 조선신궁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것을 두고 국민의례가 아닌 분명한 종교적 숭배행위로 표명하여 목숨을 걸고 반대운동을 펼쳤다. 이런 사회적·종교적 활동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점차 탈세속화 되어 가고 있었다. 민족적 현실이나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이 세상의 자리에서 떠나, 신앙적으로 승화한 저 세상의 목표에 몰입되어 갔다.
그 이유로는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이후 한반도에 몇몇 이데올로기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는 노력으로 인해 6.25 남·북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한반도는 황폐해졌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신앙이 어느 쪽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고 있고 그것을 위해 싸우는 행동을 보일 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에게 일제 강점기 때와 같은 목숨에 위협을 받는 고난을 받으면서도 우리가 잘 아는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자를 양자 삼는 탈역사적 기독교인이 아닌 바른 가치를 가르치는 어른이 있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신조나 교리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지 못한 것에 있다. 휴전이 선언 되고 남한은 여러 나라들의 지원을 통해 잘살아보고자 하는 희망이 생겼다. 물질적 지원과 동시에 세계적인 부흥사들이 한국을 방문하였고, 이곳저곳에서 복을 기원하고 상한 자들을 치유하는 치유의 역사가 기독교 복음 가운데 일어났다. 이들의 사역은 실제로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고, 많은 사람들이 복을 쫓아 기독교로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이들은 지극히 현세중심적 신앙으로만 나아갔고, 기독교인이라는 껍데기 만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
Ⅲ. 일제 강점기간 동안 기독교의 저항 이근삼, 「기독교와 신도국가주의의 대결」, 최재건, 원성현 역 (서울: 생명의 양식, 2008), 354-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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