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w Miltoncriticism비평가의 일은 그 시를 논리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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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The new Miltoncriticism비평가의 일은 그 시를 논리적으로 만드는 것이다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내가 왕이라면, 나를 제외한 그 어떤 밀턴주의자도 이론을 만들어낼 수 없는 법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유는 학설(theory)을 만들어내는 밀턴주의자들이 내가 주장하는 것을 거의 항상 “학설 오류”(theory mistake)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거대한 이론적 진실(종종 의심가는 것)을 발표하고 난후 밀턴이 그것을 알거나 모른 채로 악의 무리(Devils party)에 속해있다는 설명이 필요한 결론을 주장한다; 혹은 실낙원의 공식적 정설이 - 불복종, 상실 그리고 가능한 구원의 - 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할지라도 그 시의 힘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말하고 그것이 더 나은 이야기라는 결론이다; 또는 밀턴이 그의 작품 속의 희곡에서 급진적인 힘을 무시하거나 미학화하거나 비난한 정설 확립에 의해 지나치게 오랫동안 사로잡혀있었다는 결론이다; 또는 밀턴 시와 산문이 단 하나의 진실도 말하고 있지 않지만, 받은 유일한 메시지는 불안정, 변덕 그리고 불확정이라는 메시지가 존재하는 점에 대한 사실과 진실의 사안들을 문제화시킨다는 결론이다; 혹은 자유를 찬양하고 폭정을 비난하는 시에서, 전제정치의 가장 강한 이미지가 그 어떤 정당한 이유도 없이 특별한 복종을 요구하는 신에 의해 이끌어지는 천국이라는 결론이다. 이 글에서 나는 이러한 결론들을 고려하지 않겠지만(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여), 아마도 그들이 다다르게 된 주장의 논리는 생각해볼 작정이다.
이러한 결론에 내고 그에 따른 주장들을 펼쳐온 자들은 “신 밀턴비평”의 선두주자들 혹은 “게릴라 밀턴주의자들(다른이들 사이에서 Michael Bryson, Stephen Dobranski, Neil Forsyth, Peter Herman, William Kolbrener, Ronald Levao, Catherine Gimelli Martin, Lucy Newlin, David Norbrook, William Poole, John Rogers, John Rumrich, Elizabeth Sauer, Regina Schwartz, Jeffrey Shoulson, Victoria Silver, Richard Streier and Shari Zimmerman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용감한 형제자매들의 무리)”로서 스스로를 나타내거나 그렇게 불리기도 한다. 보다 영예로운 말이 Joseph Wittreich, John Shawcross, Christopher Hill, Dennies Saurat, A.J.A. Waldock, John Carey와 John Peter에게 주어졌고, 지나친 경의가 William Empson에게 표해지기도 한다. Michael Lieb은 신 밀턴주의자(New Miltonist) 당원 중에 있어야하는 사람으로서 종종 언급되며, 공포와 무서움을 불어넣는 격노한 신에 대한 그의 많은 분석을 받게 되지만, Lieb은 결국 보수단체 내에 머무르게 된다.
그 지배력을 누그러뜨리지 못할 보수적 경향은 Peter Herman에 의해 작성된다:
밀턴은 절대적으로 철저한 필연적 시인이다
실낙원은 논리적이다
비평가의 일은 그 시를 논리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이야기의 주요 악당들은 C.S. Lewis인데, 그는 자신의 목적이 적어도 독자들이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고 인정하는 정직함을 가진 인물이며, 또 다른 인물로 Stanley Fish는 불능에 가까운 파멸을 초래하는 40년간의 영향력 이후, Michael Bryson과 같은 자가 “시간이 ‘충분한 것을’ 말해왔다”고 외칠 때 조차도, 무대에서 내려오길 거부한 자이다.
신 밀턴주의자들이 전형적으로 미치는 결론에서의 나의 리스트는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악마(Devil)가 그의 영웅이 아니었다면” 실낙원이 더 좋은 시가 되었을 것이라고 일찍이 말했던 Dryden보다 더 새로울 것이 없다고 당신들에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치명적인 비평이라고 하긴 힘들다. 밀턴에 대한 특정 설명이 예전 것인지 새로운 것인지는 요점을 벗어난 이야기이다. 포인트는 바로 그것이 올바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구조주의 이론의 특정 시각에 관한 그들의 일부 경우만 바라보고 있는 신 밀턴주의자들에게 문제를 제시한다; 왜냐하면 다중 발성법, 원근법주의, 무한한 다중적 의미, 진실의 원문중심주의에 대한 전념 - 특정 텍스트의 특징으로서가 아닌, 어떤 텍스트든지 간에 필수적인 특징으로서 - 은 그들이 C.S. Lewis와 나의 해석에 대한 그릇됨 혹은 밀턴 해석의 옳음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중심 위치를 그들에게서 앗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텍스트 - Browning의 The Ring and The Book 또는 영화 Rashomon과 같은 - 에 대해 그것이 전달하려하는 것에 대한 어떤 결론으로든 독자와 시청자가 다다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한 가지 사실이다; 그것은 단지 작가나 영화제작자의 의도, 즉 증거에 의해 지원받을 수 있는 주장에 대한 당신의 관점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텍스트든지 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데, 왜냐하면 모든 텍스트가 원래 천성적으로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석을 위한 예비수단이 아니라, 그 불가능성에 대한 공표이며 텍스트가 의미하는 것을 명시하기 위한 노력의 끝이다. 왜냐하면 모든 텍스트가 모든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단 한 가지도 의미하지 못하고, 당신이 그것에 대해 말하는 어떤 것이든 틀렸다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갈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또한 당신은 그것이 밀턴 텍스트를 왜곡했음을 불평함으로써 해석적 정통성(orthodoxy)을 분명하게 거부할 수도 없다. 무한한 의미의 논리에 의해, 왜곡할 것이 없고, 신과 복종을 시에서 도덕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의미는 사탄과 반역에게 대주교의 권위를 부여하는 의미만큼이나 훌륭하다.
이러한 난관과 직면하여, 이론의 먹잇감으로 걸려든 일부 밀턴주의자들은 절망적이지만 논리적으로 불가피한 그들 자신의 읽기(자신을 드러내기에 앞서)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는 과정을 밟는다. Carl Freedman은 “How To Do Things With Milton"이라는 불길한 타이틀이 달린 에세이에서 이러한 우를 범하고 있다.(만약 당신이 밀턴 해석자라면, 당신이 밀턴을 가지고 해야만 할 유일한 한 가지가 있다 -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이다. 당신이 한 그 밖의 다른 일은 흥미로울지는 모르나, 그것이 해석은 아닐 것이다.) Freedman이 주장하길, “모든 읽기”는 “불가피하게 반응만 하는 것이 아닌 그 사물의 구조에 참여하는 흥미가 느껴지는 읽기”이다. 만약 텍스트가 의미하는 것에 대한 어떤 설명이든 해석자의 배경, 소속, 그리고 책임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는 영향을 받는다고 Freedman이 말하고 있다면, 그의 말은 진부하면서도 무해하다. 그러나 만약 흥미를 느낀 독자에 의한 해석은 제쳐두고서라도, 텍스트도, 의미도 없으며 그리하여 모든 읽기가 하나의 독특하고 빼어난 경우라고 그가 말하고 있다면, 그는 아무런 관심 없이 밀턴에 대해 그가 말하는 무엇이든지 묘사한 것이다.
Freedman은 명백히 후자를 의도하고 있으며, 그에게 “비평적인 말이 수행적인 표현보다 덜 진리값을 가진다”는 타이틀을 준 J.L. Austin으로부터의 말을 차용함으로써, 그의 입장을 지지한다. 문제는 진리값을 가지는 것과 수행적인 표현 사이의 구별이 How To Do Things With Words(Oxford University Press, 1962)의 과정에서 Austin에 의해 행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 책에서 핵심적인 순간은 Austin이 진리값을 가지는 것이 - 묘사하거나 보고하거나 암시하는 연설 행위 - 또한 수행적으로 표현하는 것 - 그것이 보고하는 것에 이르게 하는 연설 행위 - 이라고 주장할 때와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의 행복은 진리값을 가지는 것이 그러는 것만큼이나 사실 문제에 달려있다고 덧붙일 때이다. 말하자면, Freedman이 한 대로, “모든 비평 행위가 수행적인 노동이다”라는 말은 비평을 그 세부적인 개개의 언어의 행동과 구별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며, 비평적 행동이 옳고/그름, 정확함/부정확함, 타켓/틀에 박히지 않음의 규범적인 어휘에 의해 평가될 수 없음을 말하려는 것은 확실히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Freedman이 말하려는 것이며, 그는 자신의 근거로서 그에게 그런 타이틀을 준 이론가의 오해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른 논평자들의 글을 비평하는데 있어 그가 “완벽하게 ‘진실된’ 읽기와 함께 암시적으로 그들에 대한 진리값을 매기고 있다”는 “인상”을 주길 원치 않는다고 주장하는 그를 보게 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즉시 자신의 읽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밀턴은 주로 혁명론자이자 국왕살해자로서, 자유의 선지자로서, 막스와 전체 막스주의자들의 전통과 더불어, Blake와 Shelley와 같은 반율법주의-혁명가들과 함께 전 세대에 걸쳐 깊은 관계가 있던 인물로서 읽혀져야 한다”(23). 이제 그것은 밀턴 읽기에 대해 완벽히 논리적인 대상(후보)이지만, 그가 어떤 주장도 펼치지 못한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자에 의해 그것이 진지하게 의견으로 나올 수 없다.
이후, Freedman은 Austin에서 Pierre Macherey에게로 돌아서는데, 그는 Pierre에 대해 “문학이 이데올로기적인 모순과 차이를 중시하는 것 같다”고 말함으로써 요약한다. 그는 Empson 또한 실낙원을 “매우 그런 방식으로” 읽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러나 Macherey의 “분석 방식이 주로 저명한 텍스트적 이데올로기-비평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Empson은 Freedman이 “태연한 고의성”이라 일컫는 것에 몰두해 있다. 즉, Empson은 사실 밀턴이 의중했던 것에 대한 진실로 자신이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자신만의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데, 이것은 다행스럽게도 이론의 명제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는 우연히 올바른 읽기를 고안해내는데 - 즉, 문학이 항상 하는 것과 함께 시행 읽기: 모순과 차이를 중시하는 것 - 그러나 그는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