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 B.C 551~479) 사상에 귀착되고 만다. 즉 그들은 서구의 민주주의적 평등 개념을 접하여 이를 다시 공자의 사상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논어(論語)》에서 ‘교(敎)’와 ‘회(誨)’를 동일 개념으로 해석하여 공자가 평등한 교육을 실천하였거나 실천에 노력한 교육자였다
철학자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은 역시 공자일 것이다. 공자는 춘추말기의 저명한 사상가, 정치가, 교육가이면서 유가학설의 창시자이다. 공자는 관학위주로 되어있던 춘추시대에 유가로 민간을 위주로 한 사학을 개창하면서 일생동안 삼천 여명의 제자를 거느렸고 능통한 수제자도 많이 배출해
강력해짐에 따른 방어선의 구축으로 설명 할 수 있다.
진의 단명원인으로 이야기하던 대외정벌, 토목공사, 법가정책, 사상의 통제는 바로 황제 지배체제의 속성들이다. 또한 장성은 새로운 증축이 아닌 기존의 장성을 이어 붙이는 것으로 노역의 징발은 엄혹한 것 보다는 느슨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상이었던 유가에 대해 반기를 들었는데, 특히 복잡하고 번거로운 禮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일생을 제자들과 함께 魯, 宋, 楚, 齊나라 등에서 활동하였다. 묵자는 이 과정에서 명령하달식 교육방법으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가르쳤다. 공자와 유가
교육을 다오. 그러면 반세기 이내에 유럽인의 성격을 변화시켜 놓을 수 있다.” J. Locke은 “아동은 수동적 백지 수동적 백지(tabula rasa) : 인간의 마음은 하얀 백지와 같은 상태로 태어난다.
(tabula rasa)와 같아서 어떤 인간으로든지 만들 수 있다.”라고 말했다. 동양의 학자인 공자는 “학습에 의하여 현
묵자의 겸애사상은 "똑같이 사랑하니 아버지가 없는 것"이라 하여, 義는 있으나 仁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극단적 개인주의자인 양주의 사상 역시 "자신만을 위하니 군주가 없는 것"이라 하여, 仁은 있으나 義는 없는 사상이라 하였다. 공자가 아직 주나라의 예악이 남아 있는 춘추시대에 인으로써 세상
年間에, 朱熹는 '논어'와《孟子》, 《禮記》
가운데의《大學》과《中庸》을 합하여 ‘四書’라고 칭하였다.
본서를 선택한 이유는 논어에 나타나는 공자의 스승상을 살펴보고 이 스승상이 현대
교육의 이상상과 아울러 성서의 스승상과 새롭게 대화할 가능성이 있는지 살펴보는 데
있다.
철학의 개념들이 실제 수련의 구체적 과정이나 기술적 맥락들과 별로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즉, 현대 사회에서 실현될 수 있는 무도 수련의 가치와 그 가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수련 방법의 문제가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지난 50년 동안 한국의 태권도는 국제적으로 눈부신 성장
사상은 주로 우리 인간계의 화복과 흥망이 천명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聖帝(성제), 明王(명왕)은 천명을 받들어 천하를 다스리고 庸君(용군), 暗主(암주)는 천명을 거슬렀으므로 패망했다. 개인의 화복도 그와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천명은 정치, 윤리, 교육, 형법의 원리가 되었다. 그 원리 밑에서 모
사상의 근본특징이다.
즐거움(樂)은 본래 유가의 음악교육과 관계가 있다. 공자는 일찍이 시와 음악 교육을 중시하였다. "詩에서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싫어하는 마음을) 흥기시키며, 禮에 서며, 樂에서 완성한다"({논어}, [태백]) 이에 따르면 공자는 음악을 교육의 가장 마지막에 이루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