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으로 불리는 유물사관 그리고 역사적 사실의 고증적 인식을 주로 하는 실증사학으로 크게 분류 될 수 있다.
실증사학계로써 해방이후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하여 대학에서의 후계 양성 등 역사학계를 이끌어 간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되던 이병도의 삶과 그의 역사인식의 내용과 한계 그리고 사
이병도, 신석호 등의 조선인 사학자들을 포함시켰다. 당시 일본인 학자 중에서 이마니시 류는 단군조선을 고려 중기 이후의 조작으로, 진번군은 충청-전라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한국 고대사를 중국과 일본에 의한 피지배와 굴욕의 역사라 주장하였다.
2) 식민사관 극복과정과 랑케의 실증사학
독립
실증적 역사 방법론을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병도는 24세 때 귀국하여 중앙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31세 때 일제의 어용 기관으로 알려진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였다. 이 때는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이 중국에서 지은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국내에 유입되던 시기였다.
사학은 무엇보다도 역사학으로서의 독립성과 민족사학으로서의 독자성이 함께 달성되어야 하는 과제와 전통적인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낡은 역사관을 극복하여야 하는 동시에 역사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정립시켜야 한다. 여러가지 혼돈 속에서 해방 후 민족분단으로 남한은 실증사학이 민족주의사학
Ⅰ. 서론
근세의 일본과 조선은 대등 외교 관계였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강호 말기에 국학의 서민 상류층 보급과 때를 같이하여 고대사 연구가 활발해 지면서 비역사적 사실인 신공 왕후의 삼한정벌을 근거로 조선은 본디 일본의 영토였다고 주장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풍신수길의 조선 침략
사학의 독소를 벗어나야 하는 당면 과제와 봉건체제 극복을 위한 시대과업을 동시에 지고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전개과정이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한국의 근대역사학은 항일운동 내지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근대 사학자들은 단순한 역사가가 아니라, 독립운
1.한국인은 단일 혈통이 아니다.
우리민족의 원류가 북방계와 남방계로 이뤄져 있다는 것은 학계가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단일 민족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민족의 동질성과 민족적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해 나온 얘기이지만 이는 역사를 바로 보는 길이 아닌 것이
Ⅰ. 머리말
한국사 시대구분에 관한 토론회는 남한의 경우에는 1967년에서 1968년에 걸쳐서 처음 있었다. 이때는 4월혁명 이후 민족사학의 발전 속에서 일제하 식민사학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비판 극복함으로써 한국사의 주체적이고 발전적인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인식되었고, 그것을 위한 체계화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 박사는 10여 년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지식인들이 중독(중국의 해독)과 왜독(일본의 해독)과 양독(서양의 해독) 등 3독에 빠져 있으며, 이 3독을 치유하려면 특히 식민사관에 물든 역사학자들이 반성하고, 민족 주체성에 입각해 바른 역사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실증주의 중 어떠한 관점에서 역사교육을 할 것인가를 논의함에 있어, 먼저 역사와 역사교육의 개념과 전통, 목적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역사학과 한국 역사학의 흐름을 정리함으로써 민족주의와 실증주의를 포함한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