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는 개인의 사생활에 유익을 위함이 아니며 절대적으로 은사 받은 자가 교회의 지체로서 유익되게 쓰임 받도록 하심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교회를 이루는 회중은 몸 된 교회의 지체이다. 그런데 교회의 각 부분에서 합당한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성서 속에서 선포되었듯이, 우리는 위(인)격 속에서 오직 구별이 계시되고 있는 가장 높은 일체성의 한 하나님을 고백한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음과 같이 부르고 있듯이, 성서는 하나님의 능력처럼 말씀을
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잠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이와 같이 언어생활에 관해 가르쳐 주시는 성경 말씀을 종합해 보면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귀를 기울여 잘 듣는 편
성령의 인도하심을 깨닫지 못한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전적인 지,정,의가 부패하고 마귀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것이 원죄 아래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양심을 통하여 선행의 은혜를 줌으로서 하나님을 자각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깨닫고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단계이며 자
하신 그리스도의 화목의 역사는 바로 하늘과 땅이 하나되는 완전하 교회상이다.( 하나되는 완전한 교회 엡1:7-132:18-22,4:4-6; 고전12:12-13.)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5-29절에 "내가 교회의 일군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마세와 만대
교회의 정체성을 다시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칼빈은 그 당시 가톨릭교회의 부패상과 화석화된 교리, 재세례파의 도전에 직면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정립했고, 목회를 하면서 교회를 개혁하였기에 그를 통해 우리 주님이 몸소 세우신 교회 상을 정립하는일은 분명히 의미 있는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악령들에 대한 숭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포리피리의 연약함에 관하여’, ‘심지어 아풀레이우스의 오류보다 더 악한 포르피리의 불경건함에 관하여’ 알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포르피리가 참된 지혜인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몽매하게 된 것은 어찌된 일인가?
때만 알려질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는 방법으로 세상 창조라는 방법을 임의로 선택하셨다. 위의 책
롬 1:20의 말씀처럼 창조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에게 반응하도록 요구하신다. 성경적 창조 교리를 이해하게 되면, 매일일상의
하나님에 관한 교의의 논술에 있어서 어떤 신학자들은 유신론 즉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신론과 구별하여 따로 개진한다. 그러나 이 논의를 신론의 한 부분으로 그 첫머리에 편입 하는 것은 보다 더 오랜 방법이다. 신론의 내용을 『하나님의 실유』와 『하나님의 사역』의 두 편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례는 눈으로 보는 복음이다. 이 성례를 바로 집행하면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에 이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확고히 한다. 성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강화목적으로 집행된다. 그리스도가 이룩한 구원이 우리 몸의 부분들에 적용되어 확실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미 교회가 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