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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변·보수학계의 서술도 여기서 거리가 멀지 않다. 국가공식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ꡔ한국현대사ꡕ(1982)와 ‘고시용 국사교과서’로 통용되던 변태섭의 ꡔ한국사통론ꡕ(1986)은, 10.26 이후 사회혼란과 대학생 시위의 과격화로 인해 ‘광주사태’가 발생했으며, 정부는 비
광주였으며, 왜 그 대상은 민중이었는가. 5월 18일 전남대 정문에서부터 시작된 공수부대와 투쟁세력과의 마찰은 이후 한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대 정권의 12.12쿠테타에 이은 대(對)민중의 5.17쿠테타로 기록되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은 많은 한계 속에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전략적으로 볼 때
2) 광주시민의 시민의식 발휘
위의 내용을 볼 때 19, 20, 21일까지 광주 시민들이 봉기하여 계엄군에 항거함으로써 신군부의 작전은 차질을 빚었고, 22일부터 27일까지는 계엄군이 시민군에 의하여 퇴각한 일종의 자치구와 같은 이른바 금남로 해방구를 형성한다.
이 기간 동안 시민군에 의해 자치
광주는 다시 한번 전 국민에게 그리고 죄 지은 자들에게 새로운 마음으로 다가 갈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5.18항쟁은 우리나라의 민중항쟁의 역사 속에서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과거 동학농민전쟁부터 87년 6월 항쟁까지 일련의 역사 속에서 빠질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우리나라 현대사
5.18은 잘 정리해서 역사책의 한 귀퉁이에 모셔두어야 할 박제화 된 과거가 아니라, 새로운 현재적 관점에서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또 그것을 통해서 현재를 바라보는 눈을 더욱 풍부화 시켜가야 한다. 이러할 때, 우리는 5.18을 가장 진지하고 처절하게 되새겨왔던 진보세력의 ‘광주민중항쟁’론의 성취
5월 15일 광주지역의 대학학생회연합으로 발표된 「제2 시국선언문」에서는 15개항의 강령을 채택하여 농촌문제, 노동자문제, 학원문제와 계엄령, 군대와 경찰, 과도정부, 언론 등에 관하여 거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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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518광주민주화운동(518광주민중항쟁, 518광주민주항쟁)의 한
5년 해방을 현대의 시작이라 보는 두 가지 설(說)이 공존하다가 잠정적으로 1945년 설에 합의하였으나 1980년 전후 1926년의 ‘타도 제국주의 동맹’을 그 시작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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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한국 근대사(근현대사)의 역사
오랫동안 권위주의 체제에 익숙해 있던 일반 대중
항쟁 주체가 학생들의 선도적 역할을 매개로 전체 민중에로 확산되었으나 기층민중이 주력으로 서지 못하였고, 그 투쟁의 전술도 당시의 시대적 제약을 받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반독재 투쟁에 한정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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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518광주민주항쟁(518광주민중항쟁, 518
Ⅰ. 서론
5·18의 정치적·정책적 요인에 의해 광주 도시구조가 변화된 내용은 ① 광주시의 직할시화와 행정구역의 확장, ② 광주 첨단단지의 개발, ③ 상무신도심의 본격 개발과 기념공원 양여와 함께, ④ 5·18 사적지의 보존과 기념화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정
5년의 해방은 이들 간의 격렬한 계급투쟁을 전국적 수준에서 야기 시켰다. 해방정국에서 보수 우익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인 한민당의 주요 구성원은 호남에 근거하는 대지주계급이었으며, 동시에 미군정에 끈질기게 저항한 사람들도 호남 민중이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호남 민중에게는 곧 생존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