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을 무찌르고, 몽고제국이 중국을 재통일시켰던 것이다. 몽고족은 남송을 격파하기에 앞서 1271년 元(원)을 세웠다. 지금의 북경에 大都(대도)라는 명칭의 수도를 세우고 본격적인 중국 지배에 들어갔다. 원은 1368년 명에 의해 붕괴될 때까지 중국을 약 1세기에 거쳐 통치했다. 몽고족에 의한 중국의
남송 지방을 완전히 장악했고 남송에 파견을 가있던 몽골의 주력 정예군(청군)가 고려를 치기 위해 집결한다.
이후에 몽골은 우리나라에게 완전한 항복과 우리나라 정부가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요구하면서 몇 번이나 침공을 반복한다. 3차 침입(1235년)에는 당을태가 지휘하는 군대가 고려의 항복을 요
남송의 유민을 배제하였던 것은 역시 정복왕조로서의 경계심을 보인 것이라 하겠다
★ 문화
원나라는 많은 이민족문화를 수용하고 있던 다민족국가였고, 복합적 사회였으며, 거기에 지배민족인 몽골인 사회는 근각을 존중하는 봉건적 신분제사회였다. 따라서 통치에 있어서도 신분제 의식에 좇아서
남송(南宋)의 주희(朱熹) 등의 성(姓)을 따서 주정장주학(周程張朱學), 또는 그 출생지의 이름을 따서 염락관민학(濂洛關學)이라고도 하나, 단적으로 말해서 주희의 주자학(朱子學)으로 대표된다.
성리학(性理學)이란? 북송(北宋)의 정호(程顥)는 천리(天理)를 논하였고 그 아우 정이(程)는 ‘성즉리(性卽
남송(南宋)으로부터 정동대장군으로, 435년 북위(北魏)로부터 정동장군으로, 463년 남송으로부터 거기대장군으로, 479년 남제(南齊)로부터 표기대장군으로 책봉 받았다. 그런데 책봉은 장수왕의 임명 조건이 아니었다. 단지 장수왕을 고구려왕으로 인정하고 고구려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중국 측의 의사
남송(南宋)의 주희(朱熹:朱子)가 집성(集成)·정리하여 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 성리학으로, 일명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 육상산(陸象山)은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을 왕양명(王陽明)이 계승하여 육왕학(陸王學)을 정립, 이것 역시 성리학이라 하나 대개의 경
성격의 정통성에 대한 생각은 『동사강목』외에도 1772년(영조 48) 세자시강원에서 나눈 대화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동궁(훗날 정조)이 남송의 말제에게 정통을 부여한 것에 대해 물어오자 안정복은 그 질문을 받아들이면서 남송의 말제의 일을 남명의 홍광의 일로 연결하여 답하였다. 이는 청
남송, 몽고, 원, 북원, 명 등의 이민족과 양면외교를 가지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교류왕조에서 성숙시킨 문화 특성적 복식 요소의 이인이 불가피하였고, 고려복식에 대한 고찰은 편의상 이들 이민족과 교류 시기별로 나누어 품관자의 관복제도 및 행례복에 초점을 맞추
삼별초는 원래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으로 만들어진 조직이다. 하지만, 당시 북쪽의 원나라가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뒤 이어 끝내 남아 있던 남송조차 멸망시키는 등 몽골은 전 세계의 대부분을 점령하는 세계 최고의 국가로 성장하는 시기였다. 이에 몽골은 고려에 많은 조공요구룰 하게 되며 고려 조정
항쟁으로 삼별초의 대몽항쟁 혹은 삼별초의 항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원래 삼별초는 최씨무신정권의 사병집단이었으며 이들은 최씨 무인정권의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당시 몽골은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이후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남송까지 멸망시키자 상황이 급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