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이 역사적인 수교를 맺었다. 탈냉전의 국제 기류 속에서 양국은 더 이상 최대적인 관계로 남아있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경제적 상호 이득을 위해 하루라도 빨리 수교를 맺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 후 12년 한․중 양국은 서로에게 정치․경제적으로 유익한
티베트와 중국
1. 프롤로그
요사이 중국은 서부 개발로 분주하다. 동서의 지역차를 좁힘으로써 국토의 균형적 발전을 도모한다는 원대한 계획 아래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서장(西藏)·신강(新疆)·내몽고(內蒙古)·청해(靑海)·협서(陝西)·산서(山西)·운남(雲南) 등지가 개발의 중심지로 관심의
1. 머리말
天下觀이란 온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그 가운데 자기 나라 위치가 어떠하며 나아가 인접 집단과 비교해 자기 족속의 특성이 어떠한가에 대한 인식을 담은 것이다.
5세기는 고구려가 대내적ㆍ대외적으로 활발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고구려인의 천하관을 살펴본다는 것은 이
1. 들어가며
조공체제라고 하면 중국의 강한 힘에 굴복했던 우리나라의 무력함이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조공체제는 그런 단선적인 시각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공체제는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중심으로한 세계질서이며 이는 수천년동안 지속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조공체제가
지난 2001년 4월 3일 기존 7종의 중학교 역사교과서 외에 <새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새로운 역사교과서(후소샤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면서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비난의 여론이 비등하게 되었으며, 한국과 중국의 정부는 재수정의 요구 자료를 공식적인 외교 경로를 통하여 일본
머리말
요즈음 우리 사회는 정신대에 대한 관심이 자못 뜨겁다. 일제시대에 이 땅의 꽃다운 여인들이 일본 군인들의 성적 노리개로 겪어야 했던 고통은 암울한 식민지시대의 적나라한 상징이다. 정신대 문제는 진정 잊고 싶은 기억이다.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될 어두운 역사의 일부분이다.
어두운
, 총독은 만주족
2. 번부
▶새롭게 편입된 내륙아시아 지역에 대한 별도의 통치형태
▶몽고, 티베트, 신장 지역. 관할 특수기관인 이번원이 중앙정부에 설치
▶번부와 유목지대의 조공국(朝貢國)까지 감독 번부 현지에는 장군, 도통, 대신 등의 관료가 파견
▶중앙의 이번원과 대등한 관계
번 부
朝貢 백잔(百殘)과 신라(新羅)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서 조공(朝貢)을 해왔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軍討伐殘國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일제 시기 일본 관학자들의 해석 -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조공(朝貢) 관계이다. 우리나라 역시 예부터 조공을 바치는 형태로 중국을 부모나라로 모시기를 자처, 중국의 문화적 테두리 안에 자리 잡아 왔다. 하지만 전통적 사회 발전의 한계가 부각되고 전통 사회의 틀이 깨지기 시작한 시기가 오자, 자연스럽게 중화제국의 재편이 활발히 진행된다. 일본 오키나
조공사(朝貢使)를 파견하여 당과 외교관계를 맺으려 하였다. 고구려는 고구려 영류왕(營留王) 2년(619)에 처음 조공사를 보냈고, 백제와 신라는 같은 해인 무왕(武王) 23년(621)과 진평왕(眞平王) 43년(621)에 각각 처음으로 조공사를 보냈다. 그런데 당은 삼국의 조공사가 처음 도착했을 때 책봉해주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