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갑자사화’로 나타났고 이 두 차례의 사화로 영남 사림의 대부분이 몰락하였다.
중종 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난 후, 중종은 왕도 정치의 실현을 목적으로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때의 사림은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대거 등용되었
사화 등으로 물러났던 사림을 다시 등용하였다. 조광조는 이러한 정치 상황 속에서 사림의 지도자로 부상하여 중종 초기의 개혁 정치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였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 사류들은 개혁의 대상으로 훈구 세력의 정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자 하였고 유교적 이상 국가를 건설하
사화가 발생되었으며 더 나아가 붕당이라는 정치집단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기존의 연구는 사림의 등장으로 주도권 장악을 위한 파벌싸움이 사화를 발생시켰고 그 연장선상에서 붕당이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견해는 일제의 식민지 침략을 합리화하고 통치의 영속
애니미즘(animism)
무생물계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세계관. 물신숭배(物神崇拜)·영혼신앙(靈魂信仰) 또는 만유정령설(萬有 精靈說)이라고도 번역되는 애니미즘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아니마(영혼)에서 나온 말이다. 영국의 인류학 자 E.B.타일러가 《원시문화》(1871)에서 이 말을 처음 사용하였는데, 애
*사화사화란 조선시대에 조신 및 선비들이 반대파에게 몰려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조선 개국 이래 역대의 임금이 문치에 힘을 쓰고 유학을 장려했기 때문에 우수한 학자가 많이 배출되고, 선비사회, 즉 유림은 활기에 차 있었다. 그러나 세조∼성종 때에 이르러 그들 사이에 사상·감정·지역관
사화가 일어나자 좌천되었다가 파직되고 여주로 추방된 후 18년 동안 칩거하였다. 1537년에 다시 등용되어 두루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545년에는 을사사화 때 소윤 조선 인종의 이복동생 경원 대군의 외숙인 윤원로, 윤원형 일파. 인종의 외숙인 윤임 일파와 세력 다툼을 벌였고, 이 때문에 을사사화가 일
소쇄원은 자연 암반에 터잡아 담을 둘러 원내와 원외로 구분되어 배치되었다. 동원(東園)에는 대봉대가 조성되었고 서원(西園)에는 화계가 있다. 서원의 언덕 위에는 별당인 제월당이 세워져있다.
3-2.계류 지역
광풍각이 있으며 여기서는 유희와 휴식을 즐겼던 것 같다. 『소쇄원도』에서는 암반위에
명종대의 정국은 이른바 사화기에서 붕당정치로 넘어가는 과도기로써 초기의 을사사화를 계기로 확립되는 척신의 지베체제에서 후기에는 착실하게 재지적 기반을 다져온 사림세력의 점차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해가는 시기였다. 이시기의 정세는 을사사화 후 김안로가 실각한 뒤 등용된 윤원형과 윤
사화가 발생했다. 그게 4세였던 연산군 10년에는 갑자사화가 발
생했고, 19세 때인 중종 14년에는 기묘사화가, 다시 45세 때는 을사사화
가 발생했다. 윤원형에 의해 장악된 조정은 을사사화 이후에도 20년이나
지속되었고, 을사사화 때는 퇴계 자신도 관직을 삭탈 당했고, 그의 형 이
해(李瀣)는 윤원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