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사화로 풍비박산되고 만다. 이 사화로 인해 매형과 맏형은 죽임을 당한다. 그러다가 부친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조부 위의 산소가 있는 전남 담양의 창평 당지산 아래로 가족들과 함께 내려와 27세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이곳에 머문다. 정병헌·이지영, 앞의 책, 261쪽.
이곳에서 송강은 자연과 더
선 비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대사헌과 이조참판을 거쳐 한성부 좌윤에 올랐으나 윤원 형의 미움을 받아 을사사화에 사사 되었다.
갑조(甲祚)는 광해군때 성균관의 유생으로 인목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유적에 삭 제되었고, 인조반정으로 강릉 참봉에 천거되었으며, 그의 아들 우암 시열(時烈)이 ..
인해 궁중을 출입, 이후 명종이 된 경원 대군과 친숙하게 지냈다.
열 살 되던 해인 1545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큰형은 죽고 아버지는 유배를 당하였는데, 관북·정평·연일 등의 유배지를 따라다녔다. 따라서 송강에게는 학문에 몰두할 조건이 주어지지 않는다.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큰형은 죽고 아버지는 유배를 당하였는데, 관북정평연일 등의 유배지를 따라다녔다. 따라서 송강에게는 학문에 몰두할 조건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의 시에 짙게 깔려 있는 절망적 허무감도 이로부터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이은봉, 송강 문학의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맏형은 장류(杖流) 도중에 죽고 아버지는 유배당하였는데, 그도 관북(關北) · 정평(定平) · 연일 등 유배지를 따라다녔다. 1551년에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그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게
을사사화 때 그의 형이 죽음을 당하자 큰 충격을 받고 그 길로 세상을 버리고 속리산에 은거 한 채 학문과 시문으로 여생을 마친 은사였다. 그는 임제의 작품을 인정하면서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고, 후에 은거생활을 하면서까지 스승으로서 임제에게 질정을 아끼지 않았으며 임제에게 학문적, 인격적,
을사사화의 여독(餘毒)이 아직도 남아있어 구시대의 청산이 정치개혁의 중요 과제로 대두되며, 사림의 명예회복이 공론화(公論化)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료들의 공직 윤리가 무너지고, 선비들의 기풍이 더러워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또한 신분적인 차별이 극심하여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매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내고,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을 구실 삼아 모든 관직을
위와 같은 견해를 편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김인후도 을사사화 이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은거하며, 줄곧 산수를 벗삼아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간다. 심지어 도연명(陶淵明) 류의 은일까지 예찬하는데, 이런 사실은 그의 문인인 오희길(吳希吉)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통해서 읽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