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에서는 작중인물끼리도 대립하고 작중인물과 서술자도 대립하고 나아가서는 그 소설의 작중인물․서술자와 독자도 대립한다. 따라서 대립의 측면에서만 판소리의 미학을 논할 수는 없다. 판소리를 판소리답게 하는 것은 대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웃음으로써 대립을 표출한다는 데 있다.
초등학생이었던 어린 시절의 ‘나’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전쟁이라는 상황을 체험하고 지각하는 것은 유년의 ‘나’이고 현재의 서술자인 ‘나’는 단지 그러한 기억을 서술하는 역할만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술하는 나와 체험하는 나 사이에는 커다란 시간 간격이 존재한다. 체험
서술자와 어떤 차이를 지니는가 하는 등의 항목이 문학을 지식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작가의 생애, 작품의 생산 연대, 창작 동기, 원형적 모티프 등 문학과 연관된 각종의 사실적 항목을 아는 것도 문학의 이론 차원의 이해이다. 문학을 지식 차원이나 이론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작품 없이 하
→ 서술자가 되도록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며 서사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음 : ‘시선’에 의존
→ 사건 간 불연속성 : 가변적인 실제 인간의 삶을 드러냄. 그와 더불어, 소시민들의 의식 속 타자성이 소설 전반을 지배하게 된다.
→ 서술자의 태도는 세 사람 중 어느 하나도 두드러지게 소설의
그렇더라도 논술은 과목도 형식도 아니다. 자신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데 논술은 필요한 한 분야다. 논술은 자아 정체된 가치관을 흥미 있는 분야를 매개로 표현하도록 해야 한다.
자라는 청소년들을 또 하나의 논술입시라는 철망에서 풀어주어야 한다.
서술자가 금수산, 봉황대, 조천석, 기린굴, 추남허 등을 나열한 것은 이들이 바로 고구려가 하늘의 인정을 받은 왕조임을 이야기해주는 전설을 지니는 유적들이기 때문이다. 홍생이 이처럼 기자 조선만을 그리워하지 않고 고구려의 동명성제를 그리워하는 것은 그가 꿈꾸는 것이 ‘고조선’이 아니라
서술자는 거처가 없이 노숙하며 일하는 막벌이 노동자로 도시의 성장과 함께 빈민층이 유령처럼 늘어나고 있는 자본주의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
이효석이 경성제국대학에 다니던 때에 우리나라는 현대 문학사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이 극도에 달했던 기간으로서 이효석의 초기 작품의 주제
매개로 하여 경제적 행위를 개인 문제에서 사회문제로까지 확대시킴으로써 내부 이야기(우리가 알고있는 허생전)의 계기로 삼고 있다. 부자 변씨와 허생과 처음 상면하는 대목은 상업적 신용에 관한 앞서의 모티브를 계승하고 있으며 변씨는 거지꼴을 하고 돈을 빌리러 온 허생이 비범한 인물임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