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황현의 생애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청년시절에 과거를 보려고 서울에 와서 문명이 높던 강위(姜瑋)·이건창(李建昌)·김택영(金澤榮)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1883년(고종 20)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하여 그의 글이 초시 초장에서 첫째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그가 시골 출신이
姜瑋)를 스승으로 삼고, 이건창(李建昌), 김택영(金澤榮)과 사귀면 시문으로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이에도 보람을 얻을 수 없어 귀향하여 농촌생활을 하며 저술에 힘썼다. 그는 도깨비가 미친 짓을 한다고 말한 세태에 휩쓸리지 않고, 정도와 정론을 명확하게 하며 구국의 자세를 찾다가, 1910년에 나라
姜瑋) 세 사람을 참석시켰고, 일본인 회원들이 그들을 대접함이 융숭하였기에 김홍집은 귀국하여 국왕에게 흥아회에 대해 호의적으로 보고하였다. 이처럼 김홍집 등 수신사 일행은 흥아회의 의도나 회원의 실체에 대해 따져보지 않고, 단지 동양 3국이 합치기만 하면 유럽인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Ⅰ. 서 론
한국의 한시는 우리 조상들의 생각과 가치과 삶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시(時)라고 볼 수 있다. 그 시를 통해 시대상을 알수 있고 삶의 모습 생활상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여기에 한 시인인 曹植(조식) 의 작품을 잠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煮豆持作羹 콩을 삶아서 죽을 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