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총독부 기관지들(매일신보와 경성일보, The Seoul Times)
총독부는 일체의 한국인 신문을 금지하였고, 일인신문까지 엄격한 통제 하에 두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총독부는 자신들의 정책들을 대중에게 선전하기 위해 기관지를 발행한다. 1910년 5월 21일 <대한매일신보>를 매수하고, <매일신보>로 바꾸어
민중의 일상생활
일본 국가총동원법의 한국 적용
노무, 물자, 자금, 시설, 사업, 출판 등의 모든 분야 총독부가 완전히 통제
물자동원이 및 노무자 징용 '국방헌금', '비행기헌납운동'을 대대적으로 선전
한국인의 놋그릇이나 부인의 금비녀까지 공출 이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더욱 격화
내정개혁은 독립과 구분.
- 이를 이토 히로부미가 보호정치시대에 정치적 목적으로 교묘히 이용, 선전 → 프로파간다의 테크닉으로서 유효: 부국강병 및 내정개혁을 통해 독립 국가로서의 발전을 도모한다고 하여 반체제 측과의 일시적인 합의 획득 성공, 이로써 저항 세력을 약화, 내정개혁의 노력
영화에 필요한 막대한 자본과 기술의 충족을 위해서 영화는 상업적 성공의 여부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초창기에 있어서 영화는 과학적 호기심만을 가지고도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었고 상업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지만 과학적 호기심만으로는 관객을 계속 극장으로 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선전자, 대변자로 복무하게 되었다. 따라서, 시기의 성격규정에 있어서 지나치고 협소한 민족주의로, 혹은 총독부 권력과 언론의 갈등관계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들을 고려했을 때, 1910년부터 1919년을 ‘민족지가 없던 시대’, 1919년에서 1940년까지를 ‘민족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