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소설을 발표했다. 또한 김복진(金復鎭)과 연학년(延鶴年) 등은 그 이전에 계급주의를 지향한 사회조직에 관계하고 있었다. 여기에 기폭 장치를 마련한 것이 동경 유학생 신분의 김기진이다. 그는 당시일본에서 유포된 신흥사회과학에 빠져든 다음 특히 계급주의를 지향한 『씨뿌리는 사람』을 탐
시조교육을 위한 근본적인 논의는 생략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5, 6차 교육과정에서도 이어져 시조교육에 대한 논의는 별다른 진전이 없이 작품의 이해와 감상, 갈래 특성 파악 등에 머물고 있다. 오히려 교과서에 실리는 시조 작품의 수가 줄어들면서 6차 교육 과정에서는 중학교 교과서에는 6수, 고등
시기에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소멸기 향가는 향찰표기의 양상이 신라시대 향가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10구체 향가의 3분단되는 형식이 4분단되는 것과 같이 단락구조에 변동이 오면서 그 길이가 점차로 늘어나고 감탄사의 위치에 변동이 나타나는 등의 변화를 보였는데, 이 가운데 <정과정곡>에서
감탄사 등 형식에 있어 공통점도 엿보인다. 이러한 형태상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하여, 고려시대의 시가를 전체적으로 포괄하여 가요나 장가라는 명칭보다는별곡이라는 명칭이 적절하다는 견해도 있다. 이처럼 고려가요에 대한 정의는 학자나 책마다 용어의 쓰임에 이견이 분분하다.
시가연구, 새문사, 2004.
개화기 시가의 창작계층은 익명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뚜렷한 유형설정과 신분성향 및 그들의 사회적 성격을 구별하기란 힘든 일이다. 따라서 선행된 연구에서 이의 유형화된 창작계층의 분류는 시가의 경우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 시가의 창작계층을 개화기의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