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부터 40년대 말기까지의 연극은 친일극 활동의 반성과 식민지적 잔재의 청산 및 새 시대에 부합되는 창작활동의 진작이라는 커다란 명제를 앞세워 전개되었지만 실제로 이 시기의 희곡창작과 연극운동에 있어서 연극인들은 각기 좌익과 우익, 혹은 중도파로 갈리어 극심한 이념 대립, 방법론의 차
연극과 희곡을 향한 열망이 타오른 시기
③ 1930년대
· 일제는 강력한 동화 통치를 시행하여 조선 민족 말살을 시도
· 카프의 해산, 황국신민의 서사, 창씨개명 등으로 민족 말살정책 시도
· 극예술연구회를 중심으로 근대극 운동 전개
· 진지한 문제의식을 가진 연극은 공연되지 못하고 신파 상
Ⅰ. 1910년대의 독립운동
미주한인사회에서 박용만 등이 제기한 ‘정부’수립론은 국외 독립운동기지화의 핵심 거점인 노령 연해주 지역에서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64년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노령 연해주의 한인사회는 1910년의 ‘합방’까지 20여만 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황무지 개척과 러
연극작업실을 개설하여 연극을 가르치고 또 많은 공연을 올렸다. 1951년에 서베를린으로 돌아온 피스카토르는 1963년에 ‘프라이에 폭크스뷔네(Freie Volksbühne, 자유민중극장)’을 설립하여 1966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을 계속하였다.
2) 피스카토르의 연극관
피스카토르의 세계관 형성에 결정적인 영
극장무대에 이르기까지 각양 각색이나 연희하는 장소로서의 개념은 연극에서 빼놓을 수 없다. 관객은 단순한 구경꾼에서 연극에 창조적으로 참여하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을 하며 무대와 객석의 호흡은 공연의 성과를 언제나 좌우한다. 희곡 또한 즉흥적, 유동적 성격의 단순한 줄거리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