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에는 여러 가지 폐단이 없지도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이 그 후예에 이르기까지 대우를 받게 된 소치로 족보를 위조하고, 나쁜 방향으로 족보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족보제도는 사회계급의 고정화를 가져오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대립을 조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족보나 종중사업에 너무
족보가 유행하였고, 신분에 따라 사회 활동 및 출세의 제한은 말 할 것도 없고, 문벌이 낮은 가문과는 혼인조차 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 족보를 만들게 된 것은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식을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족보의 편성, 간행을 촉진시킨 그 당시 사회의 특수한
족보와 종중 및 선산과 시제를 모두 폐지하는 것이며, 법률상으로는 가(家), 호주 가족이라는 용어와 호적 및 수백의 각종 법령에서 이에 관련된 조항을 모두 삭제하는 것이고, 그 결과 자녀에게 성씨를 붙일 기준을 새로 정해야 하고, 종래 가족을 한 호적에 묶어서 기재하던 원칙도 유지할 수 없게 된
Ⅰ. 서론
족보의 조직이나 내용에 관하여서는 족보의 종류와 크기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그 편집은 일정한 원칙과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공통점이 없지 않다. 족보의 내용을 대략 기록의 순서에 따라 구성요소로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서(序)와 발(跋)
첫째 서는 족보
중국 혹은 일본과의 관계라는 틀을 통해 형성된 문화복합적 매개항을 통해서만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다만 개인과의 차이점이라면 개인에게 이 매개항은 주어진 것이 되겠지만 한 민족에게 이 매개항이란 역사적으로 축적되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이 매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