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박정희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두고 다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는 군사혁명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실현한 성군으로, 그리고 조국 근대화와 자주국방을 실현한 부국강병의 아버지로 칭송되는 한편, 군사 쿠데타와 삼선개헌 및 유신체제를 통해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로
위인전 속 인물과는 달리 그도 후세의 비난을 받는 일을 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인간적이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이것은 내가 존경하는 인물이 에디슨과 같이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박정희는 도대체 어떠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사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이하 ‘봉건론자’로 약칭)는 것이다. 입장 대립의 주요한 원인은 그들이 취한 방법론상의 문제, 특히 노예와 농노를 구분하는 징표에 대한 견해 상 차이와 동방 노예소유자사회에 관한 의견 차이에 있었다. 송호정,「전근대사의 시대구분」, 『북한의 한국사인식 Ι 』, 한길사
넘어서 본격적인 사회화 기구로 작용하게 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군사정권은 정권의 지속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적 민주주의’,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구호를 내세웠고, 민족적 민주주의의 이름아래 국가의 권력은 대통령 중심으로 사유화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또한 삼선개헌을 추진하는
분단 상태이므로 근대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한국 근현대사는 1기와 2기의 근대사와 3기의 현대사로 나누어 볼 수 있고, 근대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큰 틀 위에서 근대, 민족, 세계라는 세 요소를 고려하여 한국 근현대사를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