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론가들의 공통점 - 실사구시(實事求是)정신
반고가 쓴 한서에서 처음으로 그 내용이 소개되었다고 하는 이른바 ‘실사구시’는 거의 모든 중국식 사회주의 이론가들에게 나타나는 사상의 지향점이다. 모택동이 주세조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내가 만일 오늘의 세계에 작으나마 하나의 힘이라
實事求是)와 (이용후생)을 표방하며, 실생활의 이익을 목표로 정치․경제․언어․지리․금석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연구를 이룩하였다. 실학은 그 주장하는 내용과 시대에 따라 이익(李瀷)을 대종(大宗)으로 하는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로서 토지제도 및 행정기구 등 제도상의 개혁을
『열하일기』, 담헌 홍대용의 『연기』, 박제가의 『북학의』 등이 있다.
3. 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
고증(考證)적 입장으로써 경서 및 금석․전고의 고증을 위주로 하였는데, 학문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엄격하고 객관적인 태도로써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역사, 지리, 문화 등에
實事求是)를 추구하는 학문
다산은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학문자세를 견지했다. 실증이라는 인간과 사회의 가치를 추구했던 것이다.
(4) 민(民)이 근본이다
다산 경세학의 근저에는 민(民)을 근본으로 여기는 자세 또는 민(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다. 다산이 남긴 시문들은 당시 민초의
김정희(1786-1856)는 서예가, 문예가, 고증학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본고에서 논하려는(엄밀히 말해서 살펴보려는) 김정희의 면모는 이러한 서예가, 문예가가 아니라, 조선후기 유학의 한 양상인 실학파의 학자로서의 측면이다. 따라서 그에 관한 잡다한(?) 얘기는 그의 생애와 함께 간략히 다
Ⅰ. 실학(실학사상)의 개념
공리, 공담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송유의 성리학을 망국학이라고까지 혹평하고 자기들의 고증학의 특징을 표시하였으므로, 고증학풍은 드디어 일종의 민족문화 운동의 선구적 형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증학은 ‘실사구시학’의 대명사로 불려졌으며, 혹
Ⅰ. 실학(실학사상)의 역사적 배경
실학사상을 발생시켰던 내재적 요인의 첫번째는 조선왕조가 직면하고 있었던 통치질서의 와해(瓦解) 현상에서 찾을 수 있다. 집권층의 벌열화(閥閱化), 전통적인 수취체제의 붕괴, 사회적 신분체제의 혼란, 농업 위주의 경제질서에 대한 도전 등은 조선왕조 전기의
1. 조선시대의 교육 철학
- 조선은 유교, 곧 성리학의 철학적 이론으로 무장된 도학을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이고, 불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실행함. 조선 초기를 통하여 역대 임금들은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사외제도를 전면적으로 정비하였고 세종 때에는 유교적 국가의례와 제도를 정비했으며, 유교적
Ⅰ. 시작하며
국가외교는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추진하는 것이다. 북한도 대외정책의 일차적인 목표는 자기보존 또는 생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김일성 사후 10여년이 경과하도록 북한사회는 김일성 생전에 비교해 볼 때 대내외 정책기조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으며, 다만 필
정조의 총애가 시작되다
22세(癸卯年, 1783) 봄에는 경의과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됐다. 여기서 다산은 10년 연상인 33세의 정조를 처음 만난다. 정조가 중용강의(中庸講義) 80여 조목에 관하여 답변토록 과제를 냈다. 이발기발(理發氣發)의 문제에 있어서 이벽(李檗)은 퇴계 이황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