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師程濟始而苦諫炳文不聽, 已經奏聞朝廷。廷臣以爲文武不協, 議欲召濟。
군사 정제는 비로소 경병문에게 간언을 하지만 듣지 않아 이미 조정에 상주를 올렸다.
苦諫 :고충을 무릅쓰고 간절(懇切)히 간(諫)함
而羽書報至, 則已敗?。
羽書:군사상으로 급하게 전하는 격문
보고가 이르니 이미 패배했
却說唐主李嗣源, 寵任樞密使安重誨, 連他矯制與否, 亦未嘗過問。
각설당주이사원 총임추밀사안중회 연타교제여부 역미상과문
각설하고 당나라 군주인 이사원은 추밀사인 안중회를 총애하고 임명해 그가 어제를 고친 여부는 또한 아직 일찍이 문책하지 않았다.
重誨?殺任?, ?行奏聞, 唐主反詔數?罪,
Ⅲ.‘이상곡’ 작가 쟁점
- 기존의 논의
‘이상곡(履霜曲)’의 작가를 둘러싼 논란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양주동의 ‘유녀(遊女)작가설’을 들 수 있다. ‘이상곡(履霜曲)’은 ‘가사가 음란하다’하여 성종 21년5월에 <쌍화점>, <만전춘별사>와 함께 ‘남녀상열지사’로 배척되어 개
1. 근현대 민족ㆍ민주운동과 호남의 위상
1-1. 일제 강점기 호남에서의 민중운동
정순제,「호남종횡관(湖南縱橫觀)」: “전남은 과거 갑오운동과 현금의 농민운동의 진원지로서 무산의 소작인들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부터 약자의 무기는 오직 단결뿐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면 단위로 노동단체를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새 왕조의 면모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즉위 후인 1392년 8월 13일에 도평의사사에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명하였으며, 일시 중지되었던 천도계획은 태조 2년 권중화가 왕실의 태실지를 살피고 돌아와 계룡산 도읍도를 헌상함으로써 논의가 진행되었다
3) 고려시대
940년(태조 23)에는 전국의 모든 주・부・군・현의 이름을 개정했으나 그것이 제대로 준용되지 않자 성종대(981~997)에는 이를 재확인하거나 다시 바꾸고 관・역・강・포의 이름까지도 모두 고쳤다. 그 내용은 바로 757년에 신라에서 개정했던 것을 그대로 채용하거나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