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과 새로운 출발 >
1. 해방과 교회 재건(1945~1949)
1) 기독교조선남부대회 - 감리교, 장로교 교단 환원
a. 조선기독교단 남부대회
해방당시 유일하게 존재하던 교단은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었다.
이 교단은 해방직전인 1945년 7월 19~20일 종교통합 정책에 의해 조직되어 8월 8일부터 전국에 교
부산을 선교본거지로 한 것처럼 서울에는 여러 교파의 본부가 주재하고 있어 경쟁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중국 연회로부터의 완전한 분립은 1907년에 시행되었다. 리드 목사가 최초의 남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윤치호장로가 시종여일하게 협력하였음은 두말 할 것 없다. 그리하여
Ⅰ. 서 론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종교사업이 가장 잘되는 곳이라고 한다. 따라서 별의별 잡다한 종교가 국내에 들어와 있어 사이비 종교의 천국이라고 한다. 오죽했으면 “종교백화점, 종교공장장, 종교만물상”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그만큼 우리나라의 경우 종교사업이 가장 잘되는 곳이다.
(2) 마포삼열 선교사를 돌로 치다.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위정척사운동의 영향으로 서양 오랑캐의 침입을 크게 경계하고 있던 때였다. 우리 무모한 이기풍도 서양 오랑캐를 매우 싫어하였다.
1885년 4월 5일,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우리 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
감리교회는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의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소위 `삼대 에큐메니칼 신조`라고 일컫는 사도신경, 니케아신경, 아타나시우스신경을 기독교인으로서의 공통 유산으로 계승한다. 특히 한국 감리교회는 다음의 다섯 가지 자료를 그 교리의 기반과 표준으로 삼고 있다. 즉 에큐메니칼 신조
감리교, 휘트필드의 칼빈주의적 감리교, 영국 국교회 복음주의 교회로 인해 비로소 복음주의 부흥 운동이 거대한 물줄기로 등장했다. 1729년 옥스퍼드에서 웨슬리 형제와 커크햄, 모건 등의 학생의 모임은 ꡒ신성 클럽ꡓ이라고 불렸는데 마침내 어떤 학생들이 ꡒ메소디스트ꡓ라는 정곡을
해방 후의 북한 교회
1. 김일성 정권의 대두(소련의 점령정책과 북한정권의 수립)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가 임박한 가운데 미․영․불․소의 4대 연합국은 포츠담에서 회담(1945. 7. 17~8. 2)을 갖고 전후 유럽문제의 해결과 소련군의 대일 참전에 따르는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이 회담에 참가
신학교 졸업 (1821).
* 의술 까지 연마.
* 목사안수 (1826. 7. 20).
* 1829. 런던 전도협회 소속으로 - 천진 도착 (기독교 서적. 약품).
* 홍콩에서 중국인 선교사 양성, 많은 서적 남김.
(3) 토마스목사의 처음 순교
* 퀴츠라프 선교사가 다녀간지 13년 뒤에 1865 토마스목사가 옴..
해외선교를 강화하였고, 곳곳마다 신앙그룹을 형성하도록 고무하였다. 영국의 노동조합의 출발은 바로 감리교회의 속회조직을 본떠 만든 것이며, 실제로 감리교인이 대부분이었다. 나아가 탄광과 교도소를 방문하도록 조직시켰으며,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영국은 피의 혁명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신학교의 경험
결혼 후 그는 Union Theological Seminary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그 당시 가장 자유스런 신학교였다. 이 학교에서 그는 놀랍고도 중요한 경험을 하는데 그것은 자유스런 세미나의 경험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생각과 느낌대로 그 결과가 어떠하든 흘러가는 그의 비지시적 상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