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산 윤선도 선생의 삶의 발자취
윤선도는 선조20년(1587년)에 태어나 광해군, 인조, 효종대를 거치고 현종12년(1671)에 돌아가셨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유래 없는 변란이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심해지는 가운데 서인이 득세한 시기였다. 그의 집안은 대를 이어 벼슬을 한
고산 윤선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상식적인 정보가 전부이다. 고산이 남긴 여러 작품과 후대에 연구된 업적들을 샅샅이 훑어 윤선도를 내 나름대로 해석해보겠다. 먼저, 그가 자주 접하며 하나의 기준이나 틀로서 그의 정신세계를 자극한 자연을 살펴본다. 고산의 사상적 배경을 아는 데나 저작을
1. 고산의 생애와 그의 시대 - 붕당정치와 호란의 정치적 격변기 17세기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1587년(선조20) 6월 22일 지금의 대학로 자리인 한성의 연화방(蓮花坊)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남(海南)이고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그의 가계(家系)중에 주목
고산 윤선도의 생애
윤선도(尹善道)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唯幾)의 양자이다.
유기는 유심의 동생으로 큰
고산문학의 사상성 고찰」,(조선대학교 석사학위 논문,1981),pp4~13
고산 윤선도는 1587년 (선조 20년) 음력 6월 22일 한경(서울) 연화방에서 출생하여 1671년(현종12년) 85세로 생애를 마친다. 그의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8세에 해남에 있는 백부 윤유기(尹惟幾)의 집에 대를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는 특히 가장 독자적인 우리의 어부가라고 할 수 있다.
Ⅱ. 어부사시사
1.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 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
1.윤선도의 생애 (1587-1671)
윤선도는 17세기의 초에 활동한 문인이며 대표적인 시조시인이다. 그는 1587년(선조 20)에 한성의 연화방에서 출생하였고 자를 약이(約而), 호를 고산(孤山)․해옹(海翁) 이라 하였다.
그의 유년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그가 8세 때 친부모의 곁을 떠나 숙부 관찰
3) 고산구곡가가 후대에 미치는 영향
구곡관련 문화의 향유 즉 주자의 무이구곡을 동경하는 가운데 무이구곡도를 감상하거나, 차운시를 창작하고, 개별적인 구곡을 경영하는 일은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행보와 발맞추어 율곡의 고산구곡 역시 구곡관련 문화의 일부를 차지하며 독자적인 전
이현보가 살았던 16세기는 정치적으로 당쟁이 있었던 혼탁한 시대였다. 그래서 시적 자아는 강호에 있으면서도 정치 현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안주할 수 없었기에 강호의 삶과 즐거움을 노래하는 경우에도 지나친 자연미에 대한 탄성이나 감흥을 스스로 억제하였다. (예: <어부단가>‘시름 업스니’→
2. 고산의 생애와 그의 시대
1)양란과 붕당의 격변기
앞서 말했듯이 윤선도는 17세기 전․중엽을 살다 간 인물이었다. 이 시기를 기념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이다. 두 양란은 16세기 후반 이후 차츰 들어나기 시작하던 봉건체제의 틈새와 맞물려 조선을 전기와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