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이란?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연월일의 순서에 따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역사책이다.
완질의 분량이 1,893권 888책(약 6,400만자)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이면서 이를
2백자 원고지에 옮기면 그 높이가 63
조선시대에 왕으로 즉위했으나 군(君)으로 강등된 임금은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 이들 셋이었다. 이중 노산군은 후에 숙종에 의해 단종으로 복위가 되었지만 연산군과 광해군은 끝내 `군`으로 남았다. 역사상 폭군으로 일컬어지는 광해군, 그는 정말 『광해군일기』에 기록되어 내용처럼 폭군의 모습
노산군
(魯山君)으
로 감 봉하여 강 원도 영월 땅으로 유배를 시켰다. 이때 세조는 신임이
두터운 왕방연을 호송 책임자로 임명했다. 왕방연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냇가에 앉아 천만리 머나먼 길에 라는 한편의 시
조를 지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임을 이별하옵고 이 나의 슬픔 마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귀양가게 되고 같은 해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등당합니다.
1457년 10월 24일 마침내 세조가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나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고 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종은 1681년(숙종7) 사후 224년 뒤에 노산대군으로
박종화의 금삼의 피
성종은 덕종의 둘째 아드님이시니, 열 세 살 때에 왕위에 오르셨다. 운명이 기구한 가엾은 어린 임금 단종의 삼촌으로, 단종을 노산군으로 폐위시키고 왕위에 그대로 오른 세조의 손자시다. 성종은 열 여덟 살 되시던 해 차차 성에 눈을 떠 왕의 흥미는 아릿다운 궁녀들 틈으로 흐르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 가운데 광해군이 가장 문제가 많은 임금이라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죽은 뒤에도 의도적으로 격하를 계속 당했다면 살았을 때의 업적이 만만치 않았다면 것의 반증일 수도 있다. 아니면 광해군을 쫓아내고 정권을 잡은 사람들의
Ⅰ서론
500년 역사의 조선 왕조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쫓겨나 불행한 삶을 마감했던 왕이 3명있다. 어린 나이에 즉위 했다가 숙부 수양대군에게 쫓겨났던 노산군(단종), 포학하고 방탕했다는 이유로 중종반정을 만나 쫓겨났던 연산군, 그리고 이 글에서 논증해보고자 하는 인조반정과 광해군이 그들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중추부사 노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
端宗과의 관계에서
만복사저포기에는 단종과 김시습을 연상할 수 있는 장면이 있다. 그런 장면을 단종과 관련한 사실들과 비교해 살펴보며 만복사저포기의 주제를 ‘노산군에 대한 연군의 정’으로 파악해 보고자 한다.
먼저 여인이 왜구에 의해 해침을 받는 나이는 여인이 십오륙세로 보이고
노산군'의 생모라는 이유로 종묘에서 신주가 철거되고 문종의 능침에 묻힌 관곽(棺槨)이 파헤쳐진 사건을 거론한 것이다.(세자빈 시절 단종을 낳고 문종이 즉위 이전에 세상을 떠난 그녀의 능침이 소릉(昭陵)이기 때문에 '소릉복위상소'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왕실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도덕성이 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