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百濟)가 한강(漢江)유역에서 건국(建國)․발전(發展)했던 때의 대표적(代表的)인 토성(土城)이다. 몽촌토성은 한강지류에 해당하는 이곳의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진흙을 쌓아 성벽을 만들었고, 특히 북벽의 단을 이룬 곳에서는 나무울타리를 세웠으며, 그 외곽에는 해자가 둘러져 있었음이 확인
몽촌토성 발굴 『몽촌토성』, 서울대학교 박물관, 1988, 1989.
, 1986년부터 6차에 걸쳐 이뤄진 이성산성발굴 『이성산성』, 한양대학교 박물관
, 1996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풍납토성발굴 『서울 풍납토성(백제왕성) 실츨조사연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97.
등이 이뤄지면서 백제초기역사 복원을
Ⅳ. 몽촌토성이 왕성으로 위치하기에 불합리한 점
몽촌토성은 여러 측면에서 한성시기의 왕성으로 왕궁이 있었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를 직접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궁궐이나 관청이 있었던 대형 건물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권위 있는 건물에서만 사용되는 기와가 출토되어 신분이
Ⅰ. 개요
국가의 형성과 성곽의 출현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알려진 바 있으므로 몽촌토성은 역시 전문도기를 수입하였던 국가 형성기의 정치적 엘리트계층의 주도로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출토층 위상으로는 몽촌토성 출토 전문도기 파편은 축성의 下限을 말해주는 고고학자료
몽촌토성과, 1997년 토성내의 부분적인 발굴과 그로 인한 고고학적 성과에 크게 힘을 얻고있는 풍납토성, 그리고 춘궁리 일대를 포함한 이성산성, 이렇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각각의 추정 도읍지에 대한 설명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은 위례성이라고 하는 그 어원에 대해서부터 알아보도
몽촌토성에 그 흔적이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청해진에도 목책의 자취가 남아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까지도 계속 활용되었는데 임진왜란 행주산성전투에서도 목책이 사용되었다.
② 토성(土城)
목책성의 다음 단계로 발전된 형태가 바로 토성이다. 토성은 석성과 함께 우리나라 성곽의 주종
몽촌토성 등과 같이 ‘호암산성’으로 표기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호 한우물로 지정되어 있다가 성곽 발굴 작업 결과 산성지가 문화재로 포함되면서 사적으로 지정되는 과정을 겪었지만, 최종적으로 문화재 이름을 제정할 때는 기존의 같은 종류의 문화재와 통일된 형태의
왜 백제는 송파 지역을 선택했을까?
우선 지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일대는 사방을 둘러봤을 때 기껏 높아봐야 구릉 정도의 고지대가 드문드문 있을 뿐 평탄한 들이 넓게 펼쳐져 있는 곳이다. 수리시설이나 농업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 땅의 면적과 농업 생산량이 비례하는 측면을 볼 때 여기
1.머리말
삼국사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역사를 기전체로 서술한 책이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설화를 포함한 삼국유사에 비해 사실에 충실한 기록을 하고 있는 삼국사기지만 삼국의 건국신화가 기록되어있다.
고대 국가에서 종교는 큰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Ⅰ. 풍납토성과 하남위례성
풍납토성이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25년(乙丑年) 8월 대홍수로 서벽이 유실될 당시 중국제 靑銅·斗를 비롯하여 耳飾金環·銅弩·白銅鏡·銙帶金具·紫紺色 琉璃玉, 4구획 원문수막새 등 중요 유물이 다량 출토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성 내부에서 이렇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