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혹은 간도에 대한 애착은 쉽게 버리지도 못하고, 일정부분 현상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본고에서는 대외관계사의 측면에서 이와 관련하여 조선후기 북변외교에 중요한 화두들 중 대표적인 '나선정벌'과 '백두산정계비'에서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과거 1712년에 백두산 기슭에 건립된 조선과 청의 국경을 획정하기 위한 백두산정계비가 문제된다. 이 정계비를 근거로 하여 국제법상으로 간도지역은 우리의 땅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간도지역이 우리땅임에 대하여 백두산정계비가 어떻게 문제가 되는지 그 효력에 관하여 알아보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삼았다. 그러나 이는 조선이 나름대로의 강역을 확보한 것일 뿐, 당시 중국의 명나라와 국경선에 대해 공식적으로 합의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과 중국 간에 공식적으로 국경문제가 논의되고 경계가 정해진 것은 숙종 38년(1712)이었고, 그 결과로 백두산정계비가 건립
백두산 동쪽 기슭의 비옥한 토지는 개간하지 않은 곳이 없게 되어 이를 모두 일컬어 간도(間島)라 불렀다. 따라서 두만강과 압록강 대안지역의 개간지역을 자연스레 간도라 부르게 된 것이다. 간도는 백두산 동쪽과 두만강 대안을 동간도라 부르며, 압록강 대안지역과 송화강 상류지역의 백두산 서쪽을
4절 각국의 주장에 대한 근거
1.역사적 근거
간도지역 영유권을 위한 역사적 근거마련의 대표적인 예는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이다. 동북공정은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이다. 이를 통해 중국은 분열된 소수 민족을 통합할 수 있는 통일된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