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구려
고구려는 국초부터 문자를 사용하여 「유기」라는 100권의 역사책을 편찬했고 불교의 공인과 태학이라는 학교를 세워 유교경전을 가르친 고대국가였다. 불교가 군왕은 물론 민중의 교화에까지 영향을 미친 데 반해 유교는 초기 군왕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귀족관리들에게만 국한된 학문이
장학기금 만들거나 양현고를 둠
-안향은 (충렬왕 30년) 국학의 쇠퇴를 막고 양현고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섬학전을 거두기로 건의 : 은 1근, 옷감
등을 내어 양현고에 귀속시키도록 한 일종의 장학기금
국자감 -> 25대 충렬왕 국학-> 31대 공민왕 국자감으로 환원 다시 성균관으로 고침-> 조선에 계승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국학의 재단을 튼튼히 하였다. 그리하여 점차로 성균관을 중심으로 유학의 중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안향의 문하에서 수학한 백이정이 그의 뒤를 계승한다. 백이정은 권부, 우탁과 함께 수학하다가, 그 후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10년 동안 유학하면서 정주(程
섬학전(財學田)광학전(光學田) 등 기금 의식이 있었다. 그밖에도 중건중수의 공역이 있을 때에는 관청에서 비용을 지급하였고, 필요하면 유전(儒錢)을 각출하거나 지방 유지의 보조를 받기도 하였다. 향교에서 지출되는 비용의 세목은 춘추 석전(釋奠)의 제수(祭需)와 교임(校任)의 공궤(供饋), 백일장과
섬학전을 설치하였다.
(2) 학당
국도(國都)에 세운 중등교육기관으로 지방에 세운 향교와 같은 수준의 학교이다. 학당에는 향교와는 달리 문묘를 모시지 않았다. 동서학당과 오부학당이 있었다. 동서학당은 운영이 부진하여 공양왕 3년에 문익점, 정몽주의 요청으로 5부학당으로 발달, 편성되었다.
(3)
섬학전을 설치하는 등 성리학 도입과 보급에 힘썼다.
당시 고려는 내부적으로 오랜 무신집권으로 인해 사회경제적 모순이 심화되고 사상계가 혼미, 대외적으로도 원의 멸망과 명의 발흥 등 긴장과 혼란 속에서 성리학을 열렬히 환영,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하였다. 당시 불교와 유교는
도로 삼았다.
안향: 주자학의 터전을 닦은 학조이다. 지행사상, 섬학전(일종의 교육금고로 장학기금임)제 도에 의한 국학의 부흥강조
이색: 문무겸비인을 강조 과거제에 무과를 둘 것을 강조
정몽주: 철학의 기초를 주자학에 두었으며, 교육이념은 치지궁행이며 인간상은 충군신의인 임
섬학전(贍學錢)을 만드는 것을 건의하여 선비의 양성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는데 힘썼다. 또한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을 중국에 보내 공자의 초상화와 제기(祭器)·악기(樂器)·육경(六經)·제자사(諸子史) 등의 책을 구입하여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남기기도 하였고, 밀직부사치사 이산과 전법판
섬학전」,「학모」
≠ 조선에서 양현고는 성균관학생 생필품 보급창고
⑧ 학문연구 단체「청년각」,「보문각」,「서적포」
교육기관
발 달
① 신라시대 독서삼품과(38대 원성왕)를 기원
② 고려 광종때 쌍귀의 건으로 본격적 과거실시, 958
③ 고려 인종때 과거제정비통해 더욱 발전
④ 조선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