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파>>요, <<이르꾸쯔크파>>요 뭐요 하는 숱한 어중이 떠중이들이 있었는데 그 자들은 제가끔 상전을 등에 업고 그에 아부굴종하면서 자기파들끼리 한 자리 해먹자고 날뛰었습니다.”라고 당시의 파벌화 경향에 대해 회고한 바 있다.(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 -지도사상과 구조 변화를 중심으로』, 19
1. 해방 후의 북한
건국준비위원회
2) 김일성의 세력 확장
3)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의 활동
4) 북조선 노동당 , 북조선 인민 위원회 창설
5)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수립
2. 분단의 전개와 6.25전쟁
2-1> 분단의 전개
1) 갑작스러운 광복
: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갑작스러운 항복으
연안파이건, 국내파이건 모두 적극적으로 그의 지시를 따랐다.
1945년 8월 하순, 스탈린은 북한을 소련의 지시에 의해 이끌어 갈 조선인 지도자를 추천해 보고하라는 긴급 지시를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에게 하달했다. 극동군 총사령부는 국가공안위원회 극동지부와의 협의아래 극동군 산하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3 -북한편
스칼라피노*이정식 공저 /한홍구 옮김
7장 강요된 행진
1956년 북한 내 공산주의 진영 간 파벌싸움이 극에 달했다. 김일성은 박헌영과 그 일파, 소련파와 연안파의 지도자들을 차례로 제거했으며 58년 연안파의 거두 김두봉을 숙청하였다. 라이벌들을 견제하는 데 성공한
연안파 등은 전쟁으로 어려워진 인민생활을 향상시키려면 중공업보다는 소비재부문을 먼저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갈등은 후에 ‘8월종파사건’이라는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에 결국, 중공업 우선발전과 경공업·농업의 동시발전이라는 절충적인 노선이 채택되었다. 북한은
연안파는 경공업의 우선적 발전을 주장하며 김일성 계열에 반대했다.
김일성의 경제발전전략은 정치.군사우선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목표에 의해 규정된, 사실상 군사 우선의 군수 자립 노선이었다. 자원이 전반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대규모의 자본투자가 요구되고 투자 회수 기간이 긴 중공업
연안파는 남아 있었으나 국내파는 최고 지위에 남아 있지 못했다. 경제복구와 당재건이라는 과제를 안고, 북한 정치는 매우 단합되어 있었다.
3. 당의 기초 확립 - 전쟁으로 부서진 지방의 당조직을 재건할 과제를 안고, 1954년 각급 당위원 선거, 1955년 지방선거가 실시되었고, 1956년 전국 각급 인민회의
연안파의 노선을 지지하였을 것이다.
자본축적에 있어 공업 내부의 한계는 농업 생산력 정체, 농산물 수매 가격 인상과 공산품 소매 물가 인하에 따른 협상가격차 축소, 농업 부문의 조세 수입 감소, 곡물 수매량 감소, 농업에 대한 투지 증대 등에 따라 농업으로부터의 축적 증대에 한계가 있을 경우,
연안파가 손을 잡고 있었다. 1953년 숙청 이후 연안파의 원로 김두봉은 공식적인 북한 서열 2위였다. 그 아래로 박정애 최용건 박창옥 김일 최창익이 대표 엘리트로 꼽힌다. 박창옥은 소련2세 한인이었고 김일은 27세부터 김일성의 항일 무장유격대에 가담했던 인물이다. 최창익은 연안파의 실질적 지도
유일체제 확립
1. 조선노동당의 성립과정
해방직후 북한지역에는 공산주의 세력이 ①국내파, ②연안파, ③소련파, ④빨치산파(만주파)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민족진영은 조만식을 정점으로 하는 하나의 세력으로 결집되어 있었다.
가.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 박헌영과 김일성의 역사적인 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