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씨가훈(顔氏家訓)』에 ‘인생난득(人生難得)’이라는 불교 용어를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세상 만물 중에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뜻이다. 세속의 확률이나 통계치를 들지 않더라도 억겁의 시공 인연이 겹치지 않고서야 어찌 능히 사람으로 세상에
김정희(1786-1856)는 서예가, 문예가, 고증학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본고에서 논하려는(엄밀히 말해서 살펴보려는) 김정희의 면모는 이러한 서예가, 문예가가 아니라, 조선후기 유학의 한 양상인 실학파의 학자로서의 측면이다. 따라서 그에 관한 잡다한(?) 얘기는 그의 생애와 함께 간략히 다
완당에 관한 평가는 여러 가지로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實學, 儒學, 그 중에서도 性理學, 考證學, 佛敎學, 書藝家 등으로 완당을 평가하고 있다. 그중 실학자로서의 평가에 있어서도 완당이 당시 北學派의 학문, 즉 朴劑家의 가르침과 燕行을 통한 淸朝의 발달한 고증학을 계승하였다고 하나 이른
완당 청의 고증학자 완원이 추사 김정희에게 완당이라는 호를 내려 사제의 인증을 확실히 하였는데 30대로 들어서면서 김정희는 추사보다도 완당으로 불리게 된다. 본고에서는 그의 호를 완당과 추사두개를 혼용하여 쓰기로 한다.
김정희와 연관해서는 그의 기괴한 글씨인 추사체를 먼저 떠올리게 될
<담연재 시집>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금석학과 고증학의 대가,전무 후무한 권위
추사 선생이 진심으로 공부한 것은 13경, 그 중에서도 주역이었다
<완당김공소전>
추사의 학문과 예술은 그 핵심이 모두 불교에 있다
<추사의 선학변>
추사는 문인화의 대가
‘완당바람’
출생
<완당선생 초상>
소치 허련
완당이라고 칭하였으며, 옹방강은 추사의 학문에 반하여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란 휘호를 내리고 즉석에서 사제지의를 맺었다고 한다. 추사는 이렇게 북경에서 완원, 옹방강등의 학문의 대가를 만나 경학과 금석학, 서예에 대해 깊이 연구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추사는 연경에 가서 청나라
완당(阮堂)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茶山草堂>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만덕산(萬德山)에 자리잡고 강진만을 한눈으로 굽어보는 이 다산초당은 원래는 귤동(橘洞)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었는데, 다산이 이곳에서 적거(謫居)하는 동안에 실학을 집성함으로써 문화재로서 빛을 더하게 되었다. 그러나
완당바람
@불켜짐
음 -
(김정희 등장,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잠시후 김정희 부와 박제가 함께 등장, 셋이 인사를 나눈 후 김정희 부 퇴장)
*박제가 : 청나라의 고증학은 이상보다는 현실, 관념보다는 사실을 중시하는 학문입니다. 이 북학은 관념에만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생활에 쓸모 있는 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