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매체들마저도 속속들이 더 편하고 쉬운 기능으로 탈바꿈하는 시대의 도래는 사람들로 하여금 빠르고 신속한 세계에의 도입을 끝없이 유도하며 온 세계가 한 덩어리로 운동하게 하여 각자의 멋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세계화라는 명목으로 유입된 문화들이 우리 고유의 문화를 점차 잠식해 가고
대군을 추대하여 모반하려 한다는 무고로 김제남 부자와 영창대군은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인목대비는 서궁인 덕수궁으로 쫓겨나 폐비가 되며, 그 뒤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11년 만에 인조반정으로 복위되었다는 내용이다. 《계축일기》의 작자로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뒤 대비의 측근 나인이 쓴 것
월산대군이 사망한 후 104년이 지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의주(義州)로 난을 피하였던 선조가 93년 10월 한성으로 돌아와 보니 한성 내에는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황폐되어 이곳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하였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집은 경내가 협소하므로 계
덕수궁 자리는 원래 왕궁이 아니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개인 저택이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가 서울로 돌아왔으나, 전쟁으로 인해 모든 궁궐은 불에 타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옛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이 곳을 임시 궁으로 삼고 이름도 ‘시어소’라고 하였
성종은 선왕이었던 예종의 적장자인 제안대군과 자신의 친형인 월산대군을 제치고 왕위 계승 3위의 종친의 몸으로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결탁으로 왕위에 오른 왕이었다. 또한 그는 왕위에 올랐던 당시에 13살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7년 동안 할머니인 정희왕후에게 수렴청정과 원상들에게 섭정을 받았
<조선왕조실록 요약_2>
제9대. 성종
· 생애 : 1457~1494년
· 재위기간 : 1469~1494년
· 묘호 : 성종
· 즉위 : 세조의 첫째 아들인 의경세자의 차남으로 출생. 선대 왕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 동복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오름. 나이가 불과 13세였기 때문에 할머니 정희왕후가 수렴정정 함.
(중략
Ⅰ. 덕수궁 약사
현재의 덕수궁은 궁궐의 모습을 갖추기 이전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개인 저택이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창덕궁이 불타버려, 대신에 이 저택이 환도한 선조의 행궁(임금이 임시 거처하는 곳)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 후 점차 확장함으로써 비로소 궁궐의 기능을 다 할 수 있게
덕수궁(德壽宮)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사적 제124호
조선의 5대 궁궐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것으로 조선말 고종이 살던 곳이다. 궁궐의 자리는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직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행궁(行宮)이 되었다.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뒤 1611년
일어나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이 불타 없어져 선조는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를 행궁으로 삼고 , 이곳을 시어소 또는 정릉동 행궁이라 부름
그 당시 경복궁을 재건하자는 논의중 일부에서는 경복궁이 풍수 음양설(風水陰陽說)로 불길하다는 상소(上疎)가 있어 창덕궁을 중건하기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