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천주교의 전래
천주교 전래를 통해서 수용된 서양철학의 전체적인 내용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하는 서양의 중세철학이다. 그리고 이 중세철학은 기독교신학과 그리스철학의 종합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성격을 지닌 중세의 서양철학이 천주교의 전래를 통해서 고스
Ⅰ. 천주교(가톨릭)의 기원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300백년간은 "참된 교회가 어떤 교회냐"라고 물을 필요가 없었다. 성도들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기도하며 일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4세기에 로마 콘스탄틴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하면서 수도 로마에 있는 교회지도자들에게 정치적인 힘을 주
『 무엇을 믿을 것인가? 』를 읽고...
“비(非)신앙인들에게 무엇이 궁극적인 근거가 되는가? 행동의 확실성과 당위성은 어디에서 구하는가? 어떤 인격신을 전제 마르티니는 ‘인정’이라 표현하지만 이 단어의 뉘앙스 때문에 객관적이지 않으므로 바꾸었다.
하지 않으면서 도덕 법칙을 확인, 공언하는
인격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하였는데, 인격신을 넘어서 있는 실재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선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격신의 개념에 대해 포용자체를 안하는 것인지 아직 질문으로 남아있는 상태이다. 여하튼 원불교는 이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긴다. 진리는 하나이
인격신에 대한 믿음이 서서히 무너지게 되었다. 만물을 주재하고, 삼라만상의 모든 일에 일일이 관여하는 인격신의 자리에 스미스는 ‘자연 법칙’, ‘신의 섭리’를 두었고, 세상만물은 이 섭리와 법칙에 따라서 운행된다고 믿었다. 잘 알려진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즉, 자본주의 경제사회의
인격신적 존재를 부인하는자요,
그것은 오로지 이법으로서만 존재하므로 무지·무능한 것이다. 이를 상제설적 입장에서 따진다면 무신론적이다. 그러므로 천리설의 범주 안에서는 상제는 발붙일 자리가 없다. 다산이 다시금 잊혀졌던 상제권을 되살려내려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천명이란 정녕코
인격신적인 이행이다.
-원시시대 이래 숙고된 문제인 병과 죽음을 일본의 신도신앙에서는 막연히 신의 앙화로 돌리고, 부정을 없애고 진혼을 하는 것이 앙화를 멈추게 하는 주요 종교의례였다. 그러나 율령국가가 발족된 뒤에는 신도신앙도 관료적 통제 하에 들어가 신의 위광은 국가 권력자의 투영
인격신(人格神)”을 뜻한다. 우리가 보통 인식하고 있는 신은 인간의 모습과 생각을 가진 인격적 존재, 즉 좁은 의미의 신이다. 이러한 인격신은 다분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인식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신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고대 그리스의 신들은 주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
인격신을 섬기는 특징은 이렇게 정리하였다. 지리적, 정치적 영향으로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쉽지 않았을 때 제주도민들은 서로에게 더 의지하고 진실하였을 것이다.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믿음, 마을 어른에 대한 공경이 타 지역보다 더 강하였을 것이고 그러한 특징이 제주 민간신앙에 표현되어
인격신의 개념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그것을 절대적 인격신과의 접목을 시킨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독창적 천재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철학과 신학을 양립시킬 수 있다고 논증하는 것 자체가 철학, 또는 신학 둘 중 하나만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하기 힘들거나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