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왕양명의 생애
왕양명은 이름은 수인(守仁), 자(字)는 백안(伯安), 양명은 그의 호(號)이다. 성화(成化) 8년(1472) 9월 10일에 절강성 여요(余姚)에서 태어나, 가정(嘉靖) 7년(1528) 이향(異鄕)에서 객사하였다. 향년 57세의 나이였다. {연보}에 의하면, 그의 조상은 진(晋)의 광록대부(光祿大夫) 왕람(王覽)으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온 후 28세에 진사에 합격
주자학에 만족하지 않고 성현의 학을 지향
환관 유근의 노여움을 사 귀주용장의 역승으로 좌천된 것이 학문적 전기
37세, 중앙으로 소환되어 순조로운 재출발
49세, 처음으로 치량지(致良知)의 설 제창
전습록(傳習錄)의 계속적인 간행이 양명학파
제1강 일연의 三國遺事
1. 일연 (1206~1289) 경상북도 경산 출생, 고려승려
2. 삼국유사의 의미: 고대인의 삶과 문화에 대한 풍부한 내용으로 우리 민족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으며,
이전의 책들에서 빠지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사실을 담고 있음
3. 삼국유사의 저술동기: 몽골의 침입이후 우리 민족
전습록은 왕양명(1472~1529)의 어록과 그가 제자 및 당시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모아놓은 책으로 왕양명의 학문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기본이 되는 책이다.
‘傳習’이란 말은 <논어>의 ‘경전을 익혔는가?’에서 딴 말이다. ‘傳’이란 경전에 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뜻함으로 ‘傳習’이란 ‘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辨)을 저술하였다. 이 황은 전습록논변에서 네 개 부분에 걸쳐 왕 양명을 비판하였다. 이 황은 첫째 부분에서 왕 양명이 경전을 해석하는데 선유의정론(先儒之定論)을 배척하고 자기 멋대로 해석한다고 비판하면서 왕 양명의 학설은 결국 심지병(心之炳) 즉 심을 잘못 이해한 것이
전습록논변(傳習綠論辯)」은 친민설(親民設), 심즉리설, 지행합일설을 비판한 것으로서, 양명학의 주요 골자라 할 수 있는 ‘치양지(致良知)’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으로 주목된다. 한국철학사상사, 한울 아카데미, 한국철학사연구회 p.259
한편 이황의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양명학 비판의 선봉에 서자
전습록논변(傳習錄錄辨)>, <경서석의(經書釋義)>, <심경후론(心經後論)> 등의 저술을 남겼다. 유묵(遺墨)으로 <퇴계필적(退溪筆迹)>과 <퇴도선생유첩(退陶先生遺帖)>도 전해진다. 그의 저술들은 1958년 대동문화연구원에 의해 <퇴계전서(退溪全書)>로 편찬되었다.
의 철학 사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전습록을 변론한다"고 한 것이 있고, 김세필(金世弼)도 〈십청헌집 十淸軒集〉에서 "양명 노선생이 심학을 다스렸다"고 했으니, 이를 볼 때 양명학이 우리나라에서 전해진 것은 1521년이 된다. 이해는 왕수인이 50세로 강서(江西)에 있었는데, 양명연보(陽明年譜)에 의하면 "이해에 선생이 비로소 치양지
전습록(傳習錄)》을 탐독, 그의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에 심취하였다. 그 결과 도행지는 스스로 이름을 지행(知行)으로 바꾸었는데, 이 이름은 1934년 다시 행지(行知)로 개명할 때까지 썼다.
1913년 금릉대학 4년의 과정을 1년 빨리 수석으로 졸업한 뒤 그는 관리가 되려고 하였으며, 이를 위해 도미 유학
전습록(傳習錄)》 권2에 의하면 앎의 진정한 독실처(篤實處)가 곧 행(行)이요, 행함의 명각정찰처(明覺精察處)가 곧 앎이니, 앎과 행함의 공부는 분리할 수 없다는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이 제출된 것이다. 양명학은 중국에서는 귀적파(歸寂派)수정파(修正派)현성파(現成派)로 삼분(三分)되어 발전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