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풍납토성과 하남위례성
풍납토성이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25년(乙丑年) 8월 대홍수로 서벽이 유실될 당시 중국제 靑銅·斗를 비롯하여 耳飾金環·銅弩·白銅鏡·銙帶金具·紫紺色 琉璃玉, 4구획 원문수막새 등 중요 유물이 다량 출토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성 내부에서 이렇듯
토성 발굴 『몽촌토성』, 서울대학교 박물관, 1988, 1989.
, 1986년부터 6차에 걸쳐 이뤄진 이성산성발굴 『이성산성』, 한양대학교 박물관
, 1996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풍납토성발굴 『서울 풍납토성(백제왕성) 실츨조사연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97.
등이 이뤄지면서 백제초기역사 복원을 위한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몽촌토성 것보다 앞서는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몽촌토성보다는 풍납토성이 초기 왕성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Ⅴ. 미궁에 빠진 왕성의 위치와 떠오르는 풍납토성
백제는 고구려에서 내려온 유이민들이 세운 국가였다. 온조와 비류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이 고구려
토성과, 1997년 토성내의 부분적인 발굴과 그로 인한 고고학적 성과에 크게 힘을 얻고있는 풍납토성, 그리고 춘궁리 일대를 포함한 이성산성, 이렇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각각의 추정 도읍지에 대한 설명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은 위례성이라고 하는 그 어원에 대해서부터 알아보도록 하
1.머리말
삼국사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역사를 기전체로 서술한 책이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설화를 포함한 삼국유사에 비해 사실에 충실한 기록을 하고 있는 삼국사기지만 삼국의 건국신화가 기록되어있다.
고대 국가에서 종교는 큰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토성 출토 전문도기 파편은 축성의 下限을 말해주는 고고학자료인데, 만약 수입된 후 파손되어 버려지기까지의 기간이 길지 않다면 몽촌토성의 축조 하한은 3세기 중․후반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필자는 몽촌토성 축조시점을 대략 3세기 중엽~후반경으로 보고 있다.
풍납토성과 몽
토성이었다. 고구려의 평양나성과, 백제의 풍납토성․몽촌토성․공산성․부소산성, 신라의 월성 등이 그러하다. 토성을 축조하는 방법으로는 삭토법(削土法) 산의 성벽이 통과할 지역의 내부를 파서 성벽으로 축조하는 방법.
․판축법(版築法) 진흙과 모래 등을 차례차례 다져 넣어가며
토성 등과 같이 ‘호암산성’으로 표기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호 한우물로 지정되어 있다가 성곽 발굴 작업 결과 산성지가 문화재로 포함되면서 사적으로 지정되는 과정을 겪었지만, 최종적으로 문화재 이름을 제정할 때는 기존의 같은 종류의 문화재와 통일된 형태의 명
왜 백제는 송파 지역을 선택했을까?
우선 지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일대는 사방을 둘러봤을 때 기껏 높아봐야 구릉 정도의 고지대가 드문드문 있을 뿐 평탄한 들이 넓게 펼쳐져 있는 곳이다. 수리시설이나 농업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 땅의 면적과 농업 생산량이 비례하는 측면을 볼 때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