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서학(西學)은 조선 중기 16세기 이래 중국에 와서 선교 활동을 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번역한 서학서(西學書)에 의해 소개되어졌다. 이는 서양사상과 문물(文物)로써 좁은 의미에서는 천주교를 의미하며, 그 때문에 이를 서교(西敎) 또는 천주학(天主學)이라고도 하였다. 서학(西學)의
한문서학서를 통해 서학에 접근하기 시작했고, 이들 가운데에는 권철신(權哲身, 1736~1801)을 중심인물로 하여 이기양(李基讓, 1744~1802), 권일신(權日身, ?~1792), 정약전(丁若銓, 1758~1816) 및 이벽 등과 같은 일단의 학인들을 포용하고 있던 성호좌파星湖左派로 분류되는 집단들이 있었고, 서학은 주로 이들에
한문서학서를 통해 서학에 접근하기 시작했고, 이들 가운데에는 권철신(權哲身, 1736~1801)을 중심인물로 하여 이기양(李基讓, 1744~1802), 권일신(權日身, ?~1792), 정약전(丁若銓, 1758~1816) 및 이벽 등과 같은 일단의 학인들을 포용하고 있던 성호좌파星湖左派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년)으로 대표되는 진
한문으로 번역한 서학서(西學書)에 의해 소개되어 졌다. 이는 서양사상과 문물(文物)로써 좁은 의미에서는 천주교를 의미하며, 그 때문에 이를 서교(西敎) 또는 천주학(天主學)이라고도 하였다. 서학(西學)의 과학성은 기술 관료들의 천문, 역법(曆法)에 대한 효용성으로 주목을 받았고, 실제 만국지도,
퍼져 무군멸친하는 폐단이 발생하니 우선 서학관계 서적을 불살라 없애는 것이 시급하다고 계속 상소를 하여 정조는 마침내 그 상소를 받아들여 집안에 모든 서학 관련 서학서들을 모두 불에 불태어 버리거나 물에 던져버리고 북경으로부터의 서학서 수입을 엄중 단속하라는 명을 내리었다.
유교와 천주교의 갈등
전체적으로 설명하면 유교와 천주교의 갈등은 천주교 신앙의 자체의 측면에서 보면, 신앙의 내용이 예수회 선교사가 한문 교리서를 통하여 제시하였던 유교 전통과는 조화가 깨어지고 조선의 천주교 신도를 지도하는 북경 교회의 입장이 유교 전통에 대해 강경한 비타협성을
서학서’를 통해서 조선의 지식인 학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특히 개혁을 추구하고 있었던 학자들에게 ‘서학’ 혹은 ‘천주학’ 등으로 소개되면서 환영받게 되었다. 청나라와 관계로 인해 일 년에도 수차례씩이나 청을 왕래하였던 학식 있던 사절단들은 자연스럽게 서양의 선교사들을 접촉할 수
우리 민족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도 여느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문화를 소화하고 때로는 배척하면서 사회를 유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나름의 무속 신앙이 있었고 불교, 도교, 유교, 그리고 역사에 거의 기록되지 않은, 유입에 실패한 숱한 문화들이 있었다. 어느 민족, 어느 사회든 독창적인
서학서들은 천주교의 교리와 사상을 뜻하는 내용들과 서구의 과학 기술을 의미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중국을 통한 서양문화가 조선에 전래된 것은 17세기 초부터였는데, 최초의 것은 세계지도와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였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문물과의 접촉으로 영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