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숙 ( Han Hee-sook )한국여성사학회, 여성과 역사[2018] 제28권 125~152페이지(총28페이지)
연산군의 맏딸 휘순공주(생몰년 미상)는 혼인한 이후 휘신공주로 봉호를 개칭했다. 대략 11살 즈음인 연산군 8년(1502)에 구수영의 아들 구문경과 혼인한 후 1년 정도 더 궁궐에 살다가 출합(出閤) 한 것으로 보인다. 시아버지 구수영은 영응대군의 사위이다. 휘순공주는 당대 왕실과 혼인관계를 구축하고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리던 구수영의 며느리가 되었다. 연산군은 휘순공주가 혼인을 하게 되자 규정 이상의 매우 큰 집을 새로 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말, 면포, 쌀, 비단, 호초, 노비 등 많은 경제적 혜택을 지속적으로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휘순공주는 혼인한지 불과 5년 만에 이혼을 당하였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휘순공주와 구문경은 폐위되어 공주와 부마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서인이 되었다. 또한 연산군 재위 시 받았던 많은 물...
하여주 ( Ha Yeo-ju )한국여성사학회, 여성과 역사[2018] 제28권 153~174페이지(총22페이지)
본 연구는 장렬왕후(莊烈王后)의 인조~현종 대 삶과 위상 변화를 밝히려는 시도이다. 이를 통해 17세기 조선왕실이 재정립했던 정통성과 권위 확보에 그의 존재가 어떤 작용을 했는지 살펴보았다. 장렬왕후는 국가중흥과 왕실의 위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인조의 계비로 간택됐다. 그러나 왕비 시절 간질에 걸렸다는 표면적 이유와 인조가 추진한 왕세자 책봉이라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별궁에 유폐를 당하여 지위가 하락했으나 세자와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후 장렬왕후는 사망한 인조를 위한 망곡례(望哭禮)를 거행해 위신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효종 역시 권위가 실추되었던 장렬왕후를 예우하는 태도를 취하며 왕실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 왕실 사람들이 장렬왕후의 존숭책례를 무시하자 효종은 엄한 처벌을 내렸다. 효종은 장렬왕후의 병증을 집중 치료하며 어머니에게 안정적...
김명섭 ( Kim Myung-seob )한국여성사학회, 여성과 역사[2018] 제28권 175~191페이지(총17페이지)
1920년대 항일투쟁의 과정에서 엿보이는 여성들의 활동과 그 역할을 살펴보았다. 국내와 일본, 중국과 만주 등지에서 전개된 대표적인 의열투쟁인 박열의 반천황제 투쟁과 아나키스트들의 활동, 의열단 투쟁에는 다양한 직업과 계층의 여성들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도쿄에서의 계획은 흑우회의 박열이 서울의 지도자 김한을 통해 추진되었다. 김한은 일본과의 비밀연락을 취하기 위해 기생인 강향란과 이소홍을 참여시켰다. 강향란은 박열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도쿄에 직접 방문한 바 있고, 이후 상해로 떠났다. 그녀가 중국과 한국, 일본을 연결하는 정보요원의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후 이소홍이 김한에게 보내는 박열의 편지를 두 차례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관동대지진 와중의 사회운동가 학살에 대한 보복테러가 대두되었는데, 그 단체인 기로틴단에게 폭탄과 총기를 지...
이선이 ( Lee Seon-yi )한국여성사학회, 여성과 역사[2018] 제28권 193~219페이지(총27페이지)
본 연구는 근대 동아시아 삼국(한·중·일)을 대표하는 여성이론가 나혜석, 딩링, 히라츠카 라이초우의 생애를 살펴본 후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발표했던 그들의 ‘모성’관련 글을 고찰하고 비교해보았다. 동아시아 삼국의 여성들은 식민, 반식민, 제국이라는 정치경제적 상황에 구속받으면서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삶을 영위했다. 그리고 사회문화적 삶은 전통과 근대성이 교차하면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 다룬 3인의 여성들의 인식, 특히 모성관은 근대의 변동이 만들어내는 정치경제적 요소와 사회 문화적 환경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삼국 ‘여성’들의 선택지는 근대가 갖는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자연스러운 여성의 출산, 수유능력과 육아에 대한 책임 사이의 연계성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어린 시절은 광범위한 보...
이남희 ( Lee Nam-hee )한국여성사학회, 여성과 역사[2018] 제28권 221~240페이지(총20페이지)
1945년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사회는 전례 없는 풍요로움과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는 모순된 공존이 시작되는 냉전시기를 맞게 된다. 더욱 건강하고 안정된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민이 될 아이들을 키워낼 필요성을 더욱 자각하게 되었다. 미국의 국민 육아 전문 의사였던 벤자민 스팍은 그의 저서 『육아상식』에서 더욱 안전하고 민주주의적인 미국사회를 지향하였다. 그 스스로 『육아상식』에서 탈권위주의적이고 친근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그의 책을 읽는 엄마(부모)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민주주의적 이상의 실현의 선봉에 설 엄마는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감정적으로 성숙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를 위해서는 아이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관찰하며 아이의 발달단계와 변화에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어야함을 스팍은 강조하였다. 하지만 이런 스팍의...
김영선 ( Kim Young-sun )한국여성사학회, 여성과 역사[2018] 제28권 241~266페이지(총26페이지)
이 논문은 1980년대 학술운동 및 문화운동인 「여성사연구회」와 「또하나의문화」를 중심으로 일어난 한국 주부운동론과 궤적을 현재의 담론 지형과 연결해 검토하려고 한다. 특히 무크지 발행 등, 출간작업을 통해 여성 주체를 형성하려했던 동인들이 구성한 ‘주부조직론’과 ‘사회주부’ 담론의 주요 내용과 특성을 살펴볼 것이다. 1980년대 한국에는 진보적 변혁이론이 확산되었고, 전국/지역 단위의 여성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이러한 복합적 토양에서 새로운 여성주체로서 주부가 어떻게 기획되고 재발견되었는지 이론적, 운동론적인 입장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당시 여성운동의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갔던 지식생산의 주체들은 민주화의 열망 속에 있었던 학생, 노동자, 지식인들 그리고 여러 시민단체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교차하고 길항하면서 당대의 모순적 구조를 진단했고, 변화를 위한 구체적...
이 논문은 1980년대 학술운동 및 문화운동인 「여성사연구회」와 「또하나의문화」를 중심으로 일어난 한국 주부운동론과 궤적을 현재의 담론 지형과 연결해 검토하려고 한다. 특히 무크지 발행 등, 출간작업을 통해 여성 주체를 형성하려했던 동인들이 구성한 ‘주부조직론’과 ‘사회주부’ 담론의 주요 내용과 특성을 살펴볼 것이다. 1980년대 한국에는 진보적 변혁이론이 확산되었고, 전국/지역 단위의 여성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이러한 복합적 토양에서 새로운 여성주체로서 주부가 어떻게 기획되고 재발견되었는지 이론적, 운동론적인 입장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당시 여성운동의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갔던 지식생산의 주체들은 민주화의 열망 속에 있었던 학생, 노동자, 지식인들 그리고 여러 시민단체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교차하고 길항하면서 당대의 모순적 구조를 진단했고, 변화를 위한 구체적...
문현아 ( Moon Hyun-a )한국여성사학회, 여성과 역사[2017] 제27권 193~217페이지(총25페이지)
형법 조항의 간통죄는 한국사회에서 1953년 시작되어 2015년 위헌 결정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기존의 법조계를 중심으로 한 연구는 간통죄와 관련해서 ‘성적 자기결정권’이나 ‘사생활 침해’ 등 형법 관련 조항을 중심으로 간통죄 위헌의 의미를 탐색했다. 이 논문은 기존의 접근과 관점을 달리해 결혼관계 내 여성의 지위나 관점을 중심으로 간통죄의 위헌/합헌 추이를 검토하려고 한다. 민법 개정에 노력을 기울인 여성계의 움직임과 연결하면서 간통죄의 어떤 측면이 존속론의 배경이 되었는지를 가족법 개정의 내용과 관련해서 살펴보면서 간통죄 폐지 여부와 결혼관계 내 여성이 처한 상황의 변화를 연결해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1953년 쌍벌주의를 통한 축첩제 폐지와 일부일처제도의 보호를 지향해 형법에 등장하게 된 간통죄의 배경을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임상훈 ( Lim Sang-hun )한국여성사학회, 여성과 역사[2017] 제27권 1~21페이지(총21페이지)
명(明)과 조선(朝鮮)은 폐쇄적인 성격이 매우 강한 나라로 무척 가까운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사신(使臣)들의 왕래를 허락한 것 외에는 양국 모두 서로간의 왕래를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본고는 명초 여성 이주 연구의 일환으로 조선의 공녀에 착안했다. 이 시기 여성들의 대규모 이주라고 할 만한것은 명이 건국 초기에 명 황제가 조선에게 여성의 진헌을 강요했던 ‘공녀(貢女)’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명의 영락제(永樂帝)와 선덕제(宣德帝)는 그녀들을 자신의 후궁(后宮)으로 삼기 위해 혹은 개인의 유희를 위해 조선에 7차례에 걸쳐 처녀를 강요하였으며, 그 결과 7차례에 걸쳐 총 114명의 조선 처녀들이 명 황궁(皇宮)에 진헌되었다. 본문에서는 명초조선 공녀들의 상황과 후궁과 집찬녀(執饌女) 등을 중심으로 명궁(明宮)에서의 생활 흔적과 그 영향 등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