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유리창 - 생애, 당시 시대 경향, 작품분석, 의견,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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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지용 유리창 - 생애, 당시 시대 경향, 작품분석, 의견, 느낌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정지용
1.작가의 생애
정지용은 1902년 음력 5월 15일에 4대 독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정지용의 부친은 젊었을 때에는 중국과 만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한의학을 배우고 고향에 돌아와서 한의사로서 부를 축적했었으나, 어느 해 큰 홍수에 돈과 다른 재산들을 모두 떠내려 보내는 큰 재난을 당한 후 가세가 기울어져 가난해졌다고 한다. 정지용은 형제들이 없었으므로 어린 시절 무척 외로왔으리라 짐작되며, 그는 누이를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그의 시에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라는 구절에서도 그의 누이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을 느낄 수 있겠다.정지용의 유년기는 무척 외로왔으리라 짐작된다고 했지만, 산문에 기록된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한 회상도 무척 고독하고 가난하고 슬펐던 것으로 나타난다.‘그 골 군수한테 청하기만치 무서웠던’아버지 밑에서 박달나무 팽이를 가지고 싶어했고, ‘연은 돈이 많이 들어 결국 못날리고 말았던’지용의 유년기는 특별히 엄격한 아버지와 가난한 환경 속에서 보내어진다. 이와 같은 억압과 욕구 불만의 유년기 경험도 지용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용은 ‘소년쩍 고독하고 슬프고 원통한 기억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진다.’라고 회상하고 있는데, 이 글의 내용으로 봐서는 무척 괴로웠고 상처로 침전될 소년기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그의 또다른 환경은 그러한 부정적 환경들에서 지용의 유년을 구제하고 있는 듯하다.그는 민간전승과 전설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것을 알 수 있다.이러한 분위기는 시인에게 아름다운 꿈과 동경의 세계를 가지게 했을 것이다.결국 그의 4대 독자로서의 집안에서의 위치는 무척 가난했으면서도 상급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한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 같고,그가 자긍심을 가지게 한 이유였으며, 고독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한 원인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몸서리가 떨리도록 고독하고 슬프고 가난하던 환경은 그의 사고를 내면화시키면서 그가 자란 산천과 전설의 바다 속에서 그는 시적 상상의 세계로 연결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4대독자로서의 체험과 가난한 환경, 그리고 엄격한 가부장적 가족관계와 유년의 자연 환경 등은 지용의 문학을 형성하는 복합적 근원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정지용과 송재숙 사이에는 10명이 넘는 자녀가 태어났는데,모두 태어나면서, 혹은 어려서 죽고 4남매만 장성하게 된다. 그의 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죽음의 이미지는 그의 자녀의 죽음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애끊는 심정의 표현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로서는 유리창,홍역 비극등이 있다.시인이 불행에 의하여 시적 정서와 상상력이 더욱 왕성해지는 경우도 쉽게 생각할 수 있겠으나 정지용의 경우 사랑하는 자녀의 잇따른 죽음 앞에서 창작 의욕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비극의 시기에서 한 걸음 물러나온 후에는 과 같은 훌륭한 시가 되어 나타난다.혈육의 상실이라는 비극적 경험이 그의 시를 더욱 빛나게 하기도 했던 것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정지용은 1918년(17세)에 휘문고보를 입학하게 되는데, 그 사이에 4년간의 공백기간이 생긴다. 그는 이 기간 동안을 그의 처가 쪽의 친척되는 어느 댁에 보내어져 송참사 밑에서 한학을 공부했다고한다. 그가 서울서 한문을 공부하던 시절도 그에게 상당히 고통스런 시절이었던 것 같다. 어린 나이로 고향을 떠나 남의 집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편안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안을 내어 동인을 결성하였고,적극적인 문학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런 활동의 배경에는 월탄 등의 선배에게서 자극받은 점도 있었겠으나 그 이전부터 창작에 뜻을 두고 습작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이처럼 지를 통해서 싹을 키우고 있었으며, 이 시절 그가 문학에 쏟은 정열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지용은 휘문에서 여러 가지 빛나는 활동을 하면서 시인으로서의 꿈을 키운 후,교비장학생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그는 또한 유학 기간 동안에 가톨릭 신앙을 가지게 된다. 정지용의 시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의 생애에서 그의 가톨릭 신앙은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나중에 가톨릭 생활잡지의 편집에도 참여하여 종교시를 많이 썼을 뿐만 아니라,해방 이후에는 가톨릭계인 경향신문의 주간을 맡기도 한다.휘문의 교사로서의 정지용의 모습에 대해서는 ‘방끗방끗 웃음’과 신경통으로 표현됨은, 그의 성격이 그만큼 기지와 유모어가 풍부하고 명랑한 측면이 있는가 하면,독설적이고 참을성 없이 비판적인 면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어린애처럼 천진하고 명랑하면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빠른 말 재주에 폭소와 해학으로 몰아 가는가 하면,직선적인 독설과 참을성 없는 비판으로 핀잔과 야유를 쏘아대는 그런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의 명랑성과 유모어 뒤의 내면에는 오히려 고독과 심각성같은 것이 숨어 있었던 듯하다. 그의 대인관계는 언제나 밝고 명랑한 것이었지만,밝은 표정 속에서도 가끔 가다가 돌연 심각한 얼굴로 바뀌는 때도 있었던 것을 보면, 내적으로는 고독하고 심각한 면을 감추고 있었고,집안에서는 다소 까다로운 남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논리적 사고보다는 직관적 사고의 소유자였던 것 같고, 이것이 그의 시인으로서의 발전과 명성에 긍정적으로 기여했을 것이다. 그는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도 지극히 순수하고 천진했었던 듯하다
2.당시 시대 경향
1930년대 한국 시단이 이루어놓은 크고 작은 성과들은 해방 이후 상당 기간 우리 시단의 흐름에 실질저긴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다채롭고 세련된 양식의 시작 경향과 제 조류들의 앞다툰 등장으로 1930년대 시단은 이 전에 비해 한층 풍성하고 활기찬 볼거리를 우리에게 제공해주었던 것이다.겉으로 드러난 이같은 양상들은 일차적으로 이 시기 시문학을 둘러싼 제반 여건의 다양한 변화와 성숙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개화기 이래 일본을 거쳐 도입되기 시작하였던 서구 근대의 각종 문물 및 제도들은 이후 우리의 사고와 생활에 차근차근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근대적 도시의 출현과 그것의 급격한 팽창으로 인해 이른바 도시 세대의 새로운 감각과 정서가 이 시기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엿다.즉,기록상으로 보이는 조선의 식민지 지식인들의 눈에 비친 경성 변화가의 모습은 일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각종 진귀한 상품들과 더불어,밤이면 화려한 전등불과 네온사인 아래로 수많은 인파들이 뒤엉켜 북적대는 불야성의 별천지를 이루었던 것이 사실이나,그러한 도시의 이국적인 화려함 이면에는 일제의 식민지경제정책에 의해 희생당한 농촌사회의 상대적인 황폐화와 도시 뒷골목을 헤매는 실업자ㆍ빈민ㆍ 걸인ㆍ 매음 마약 등 도시화에 따른 어두운 부산물들이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이러한 양면성은 이 시기의 일제의 식민 지배 정책의 이중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일단 1920년대 시기를 거치는 동안에는 소위 문화통치라는 다소 유연한 방식을 취하다가, 1920년대 후반을 고비로 하여 보다 노골화된 형태로 그 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자본주의적 근대화가 가져온 외형상의 화려함과는 달리,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내부 상황은 식민 본국 일본의 군국주의화가 가시화됨에 따라 점차적으로 열악하게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1930년대 시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부분은 모더니즘 시의 대두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우리 시단의 주변에는 재래의 전통 서정시가 지닌 당대 계급주의문학이 갖는 투쟁성,목적의식에서 한 걸음 탈피하여,언어의 미적 가공과 신선한 이미지의 제시 등을 통해 시 속에 시대의 변화에 걸맞는 감각적 표현들을 담아내려는 노력들이 있어왔다.이 시기 모더니즘 시운동의 경우는, 집단적이라기보다는 주로 시인 개개인의 활동들이 주축을 이루었다.애초에 정지용 등에 의해 자연발생적인 형태로 추구되었던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1930년을 전후하여 대학에서 영미 모더니즘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한 김기림,최재서 이양하 등이 문단에 진출하면서, 이들의 이론적 뒷받침이 힘입어 시단의 중심 세력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주로 서구 자본주의 문명의 세례를 받은 도시 1세대들로서,도시 생활 속에서 그들이 경험하게 된 문화적 충격을 새로운 감각과 기법 속에 담아 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3.작품분석
창유리에 붙어 서서 그 유리창에서 펼쳐지는 그림(사물)과 자녀의 죽음이라는 슬픈 경험을 통합시켜 보는 그의 통합된 감수성과 시적 재능은 뛰어난 것이었다. 유리창의 사물성을 사물성 자체로만 묘사하지는 않을 뿐먼 아니라, 자녀의 죽음의 문제를 감상적이고 주관적인 정서로 표백하거나 관념적으로 설명하지도 않는다.그의 시의 이미지에는 화자의 태도와 정서가 포함되어 있으며, ‘차고 슬픈것이 어린거린다’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물먹은 별’에서 보듯이 그 이미지들은 이 시에서 의미심장한 객관적 상관물이 되고 있다. 그 이미지가 사물성 자체만으로 기능하거나 정서의 도구나 장식의 역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이미지 자체가 관념과 정서 자체가 되고, 따라서 그의 이미지는 그의 정서를 절제하고 객관화하는 감정과 지성의 전인적 체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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