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식민지 교육의 추진기(1910-1919)
(1) 식민지 교육의 기본방침
이 시기는 일제의 무단독재의 의한 교육통제가 이루어졌던 시기로 1911년 공포된 제1차 조선 교육령에서는 식민지 교육의 기본방침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① 충량한 일본신민의 양성
② 시세와 민도에 맞는 교육
③ 일본어 보
2. 미국
1902년 12월 인천항을 떠난 101명의 한인들이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지 이제 100년이 지났다. 그 후 재미한인사회는 미국과 한국의 변화하는 정치경제적 관계 속에서 다양한 배경과 동기를 가진 한인들이 이주하여 성장을 거듭한 끝에 현재 중국(230만
1. 머리말
우리는 불과 얼마전 까지 우리나라를 단일민족이라고 배워왔고, 그것을 신화라 하여 자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에 사는 사람 중 백 명 중 한명이 외국인인 상황이 라고 하니 더 이상 그런 것을 내세우는 것은 무색할 정도가 되었다.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그의 자녀들, 그리고
선교사 내한을 요청하고 38도선 문제의 해결과 자주 독립을 위해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진정하기로 하는 등 여러 가지 사업을 결의했다.
또 교회신문인 '기독교 공보'를 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남부대회는 안팎으로부터 도전과 난관에 직면했다.
9월 새문안교회 모임에서 퇴장했던 감리교 지도자
Ⅱ. 발단 - 평양대부흥운동의 전야
1906년 신년부흥회를 통해 부흥운동의 열기가 더욱 더 저변 확대되기 시작하더니 1906년 하반기에 접어들어 평양선교사 사경회, 서울선교사 사경회, 목포부흥회, 그리고 장대현교회 준비기도회 등 네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열
▶ 한국의 절이 산으로 간 까닭은?
-절이 있는 곳
<삼국유사>에는 경주를 가리켜 '절은 밤하늘의 별처럼 널려 있고 탑은 기러기처럼 줄지어 있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시가지에 많은 절들이 세워져 있었다. 따라서 고려시대까지 국가적으로 세워진 절들은 시가지에 세워진 경우가 많았다. 소승불교가
한국인 교역자들을 파견하여 해외 선교사업을 시작한다.
(3) 교회의 참여
기독 신자들은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또한 이 운동을 통하여 그들의 영적이며 도덕적인 생활이 향상되었고 교회는 비정치화 되었다. 또한 길선주 목사를 위시하여 사경회를 인도하는 많은 목사들이
전환하였다. 이들은 민립대학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고 대학 설립인가를 총독부에 요구하였으나 허가를 받지는 못하였다. 일제는 조선인의 대학 설립 움직임을 철저히 차단하였고, 선교사의 경우에 한해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외국 정부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유화책의 일환으로 제한적
한국인 공업 자영자 혹은 일본인 공업가들에게 시범적인 실습공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③ 한국 전 지역에서 가내공업을 선도적으로 추진하고 선전 지원을 할 자영 수공인력이나 기술교사 및 조수를 양성하는 역할을 했다. 졸업생을 각 지역에 자영인력으로 내보내고 일부는 기술교사나 시험조수,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