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10년대 새로운 흐름과 새로운 문화(文化)
1910년대 중반 이후 국내 思想界에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비록 다듬어지고 완성된 형태는 아니었지만 새로운 時代思潮를 들고 나온 새로운 主役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새로운 주역들은 당시 일본 등지에 유학하여 신지식, 신사상
안서(岸曙) 김 억(金億)
Ⅰ. 안서 김억의 생애와 활동
안서 김억(1896~?)은 평주 정주 출생으로 한국 근대시의 서장을 연 개척자로 평가된다. 그는 일본 유학시기인 1914년에 일본 동경에서 발행되는 『학지광』창간호(1914. 4)에 <미련>, <이별>을 발표하였고 제5호(1915. 2)에 <야반>, <밤과나>. <나의적은새야> 등
학지광』, 『태서문예신보』 등으로 자유시 형성의 기점이 소급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개화기에 나타난 정형성의 변화양상에서 자유시 형성의 기본 모티프를 검출해야 한다는 의견 등을 적극 수렴하면서도 자유시의 정착을 거론할 때에는 형식이나 언어 면에서의 새로움 뿐만 아니라 정서나 인식의
학지광』창간호에 시「이별」「야반」「나의 적은 새야」산문시「내의 가슴」「밤과 나」를 내놓고, 이어서 1918년『태서문예신보』에 10여 편의 창작시와 서구 상징시를 번역 소개하였다. 특히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시론을 소개하고 최초의 번역시집인 『懊惱(오뇌)의 舞蹈(무도)』를 실음으로써 상
학지광》 정도를 꼽을 수 있는데, 이곳에 발표된 글들 대부분이 이 상황을 충분히 짐작케 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문학이 단지 가벼운 흥미만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시대의 어려움 속에서 작가들은 풍속계몽이나 내면 지향성 추구로 정신이 한층 성숙되었으며,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짤막한 단
무정
◎ 소설가 이광수에 대하여.
1982년 평북 정주에서 장손으로 태어났으며, 1905년 일진회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메이지 학원과 와세대 대학에서 공부하며 「학지광」을 편집했다. 1918년 귀국 후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했고 이후에는 흥사단에 가입했다. 1939년에는 친일 문학인 모임인 조선문인협회장
학지광』에 주의적 생활이란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문단 생활을 시작하는데, 『폐허』 1920년 7월에 창간된 문예동인지로서, 주로 19세기 후반 서구문학읜 상징주의와 퇴폐적 경향이 짙은 작품들이 실렸다.
와 『장미촌』 최초의 시전문지로서 주로 낭만주의적 경향을 표방하였으나, 대다수 동인들이 <백
학지광》 편집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문학작품의 발표에 정열을 쏟았다. 1931년에 ‘구제사업’이란 단편이 말썽이 되어 전문이 삭제당하고 제목만 《신단계》에 실렸다. 1932년 여름 방학에 귀향했다가 양산 농민 봉기에 연루되어 투옥되는 바람에 그해 9월에 학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1933년 남해 공립
학지광>에 1914년 창작 시 ‘이별’, ‘미련’ 등을 발표하고 서구 문학을 소개하는 글을 발표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918년 <태서문예신보>에 프랑스러시아 문학을 중심으로 서구 문학을 번역소개하고 창작시를 발표했다. 1920년에는 남궁벽 등과 함께 <폐허>동인으로 활동하였고, <창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