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3년 전 인도배낭 여행 중 친해져 아직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한 일본인 친구가 있다. 서로 그리 훌륭하지 않은 영어지만 나름대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보름 가까이 같이 여행을 다녔고 여행이 끝난 후에도 그 친구는 날 보러 두 번이나 우리나라에 왔다갔을 정도로 친한 친구다. 하지만
고산 윤선도의 시조는 기교면에서 탁월하고, 특히 <어부사시사>는 시적 구성이 유기적으로 구조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그의 시는 즉흥이라기보다는 주로 작흥에 의한 제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울러 그의 시조를 흔히 생활과 밀착되었느니, 또는 일상적이고 평범함 속에 아름다움을 찾는
仁祖反正):1623년 이귀(李貴)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이종(李倧)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다
으로 인한 인조(仁祖)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및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되고 7월에는 우의정에 발탁된다. 1927년 정묘호란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
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했다. 16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을 보도(輔導)했다. 1629년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1632년 한성부서윤(漢城府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에서 1623년 仁祖反正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의 신정부는 西人일파에 의하여 독점되었고 반정의 명분으로서 전왕의 명에 대한 배은망덕과 奴夷(후금)와의 통호를 들었다. 이 때부터 崇明事大와 斥和論이 대두되어 胡亂을일으키는 요인을 만들었다.
2. 정묘호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