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는 복잡한 수의 경우 셈을 해야하기에 감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경우 감성은 경험에서 독립된 순수한 것이 존재하여야 할 것이다. 칸트는 순수수학의 판단들은 누구도 반대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하고 경험에서 빠질 수 없는 선천적 판단이라는 것. 내가 물질의 개념에서 생각지 않던 것을 선천
존재를 알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인상만으로는 그 사물의 본성에 대한 인식을 구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기회로 해서 마음은 그런 식으로 자신에 나타나는 대상이 어떤 종류의 대상이고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예컨대 그 대상은 말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이것을 칸트
도덕적인 삶은 어렵거나 힘든 삶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 맹자의 말처럼 누구나 어려움에 부닥친 어린아이를 보면 도와주고 싶은 ‘측은지심’이 들기 마련이라고 말하고, 칸트는 도덕적 행위의 토대를 선한 행위를 하려는 의지인 ‘선의지’에서 찾고
신의 의지와 도덕률이 일치된 상태를 말한다. 그 결과로 칸트는 ‘자유’와 ‘자율’을 획득하게 된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마치 공자가 70세에 깨달은 從心所慾不踰矩의 단계와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을 동시에 지닌 이중적 존재이므로 언제라도 욕구와 애착심에
신과 악마, 영구적인 사랑과 순간적인 사랑에 대해 고민하는 그의 주인공들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우리는 '신의 세계'를 부정한 채 논리의 힘으로 선과 악을 파악하고자 하는 이반 까라마조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반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신의 세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무신론자이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