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斗緖)
시, 서, 화 삼색인 윤두서(1668~1715)는 겸재 정선, 현제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의 삼재(제)라 일컬어지지만 활동시기로 보아 엄밀히 말한다면 중기(1550경~1770경)와 후기(1770경~1850경)의 변화기에 위치하는 작가이다. 그래서 그의 회화 역시 중기 전통화풍의 계승과 후기 신경향의 선구자로 거
尹斗緖 1668~1715)
공재 윤두서는 1668년 태어난 조선 후기의 선비로서 169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조선시대 역사에서 가장 당쟁이 치열했던 숙종 때의 문인으로서 남인계열의 윤선도가 그의 증조부이다. 노론이 집권한 조선 후기 내내 당쟁의 여파로 여러 역모의 누명을 쓰곤 하였고, 자신의 집안에
3. 남종화법의 발전
1) 초기-윤두서
· 공재 윤두서 (恭齋 尹斗緖 1668~1715)
공재 윤두서는 1668년 태어난 조선 후기의 선비로서 169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조선시대 역사에서 가장 당쟁이 치열했던 숙종 때의 문인으로서 남인계열의 윤선도가 그의 증조부이다. 노론이 집권한 조선 후기 내내 당쟁
尹斗緖)가 정약용의 외증조부다. 다산의 뛰어남은 이렇게 좋은 핏줄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다산은 학자 임금 정조 대왕이 즉위하던 해인 1776년 열다섯의 나이로 서울에 사는 홍화보(洪和輔)의 외동딸에게 장가를 들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서울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다산은 서울에 살면서
국립중앙박물관 1층 특별전시실에서 열린 <보존과학, 우리문화재를 지키다>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보존과학역사 40년에 대해 다룬 전시이다. 보통 박물관의 전시들이 유물을 중심으로 보여주는데 반해 이번 전시는 보존과학 40주년을 기념한다는 기획의도에 맞춰 박물관에서 하는 일, 즉 보존처리 작업을
Ⅰ. 서 론
어느 시대이든 일반 백성들이 같이 살다보면 억울한 일을 당하면 관아에 이를 상소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는 양반보다는 평민들이 더욱 심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머슴 생활을 하는 경우 양반에게 억울함을 당해도 하소연 할 길이 더욱 막막했다. 또한 여자의 경우 칠거지악에 해당하
서론
목민심서(牧民心書)는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와 더불어 ‘1표(表) 2서(書)’라고 불리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 鏞, 1762∼18의 대표적 저서이다. 다산은 과거 급제 후 중앙정계에서 정사(政事)를 돌보았고 지방 관리로서 근무하는 등 여러 공직을 거쳤다. 뿐만 아니라 18년간의 유
서론
다산은 목민심서 서문에서 “군자의 학문은 ‘수신(修身)’이 그 절반에 해당하고, 나머지 절반은 ‘목민(牧民)’이다”라고 했다. ‘목민’이란 말은 원래 중국의 고전 관자(管子) 제1편 「목민」에 서 유래했다. 목민이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목민(牧 民)에서 목(牧)은
Ⅰ들어가는 글
완벽한 것을 구하는 것은 인간의 욕심일 것이다. 완벽한 것은 어쩌면 세상에 실존해 있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학문을 하는 학생으로서 열정이 있다면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렇게 마음이 맞는 몇 명의 친구들과
전라도의 말과 문화 답사를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진도군 운림산방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는데 나는 진도군에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것 같아 더 기대에 부풀었다. 같은 과 동기 4명과 함께 목포터미널에서 진도군에 가는 고속버스를 이용하였다. 진도군에 들어서자 진도의 자랑 진도대교가 한 눈에 보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