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개요
어부사시사에 대해서는 사적고찰, 대비연구, 율격연구, 배경연구, 강호가도, 장르문제, 어부의 세계 등 여러 가지로 이루어졌다.
김사엽은 <도학자의 가곡관>에서 고산가에는 사시의 천연기상에 따라 인과 물이 교응하는 유구함과 체념이 깃들어져 있고 완전히 중국사상을 탈피하지 못했어
고산 윤선도의 시조는 기교면에서 탁월하고, 특히 <어부사시사>는 시적 구성이 유기적으로 구조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그의 시는 즉흥이라기보다는 주로 작흥에 의한 제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울러 그의 시조를 흔히 생활과 밀착되었느니, 또는 일상적이고 평범함 속에 아름다움을 찾는
고산구곡담의 절경을 대하며, 이것을 타인(벗,사람)과 함께 더불어 즐기고자 한다. 제 1연의 초장, 중장에서 고산의 아홉고비를 사람들이 모르더니 풀을 베고 살 곳을 정하니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하였다. 그런데 화자는 혼자 발견하여 들기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벗들을 불러 함께 즐기고자 한다.
타
벼과 포아풀아과 좀새풀속 좀새풀
[명사]<식물> 볏과의 여러해살이풀. 줄기는 높이가 60cm 정도이며 잎은 오그라들거나 넓적하다. 6~7월에 꽃이 원추(圓錐) 꽃차례로 피고 열매는 영과(穎果)로 8월에 익는다. 사료로 쓴다. 고산 지대에서 자라는데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이나 제주도에
고산은 1587년(선조 20)에 서울에서 태어나 1671년(현종 12) 85세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불우했으나 문학적으로는 뜻 깊은 한 평생을 살다 갔다. 그의 몸집은 작고 체질도 연약한 편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엄숙하고 단정한 몸가짐을 가진 꼬장꼬장한 선비로서 평생토록 《소학》을 손에
(2) 고산 윤선도 선생의 삶의 발자취
윤선도는 선조20년(1587년)에 태어나 광해군, 인조, 효종대를 거치고 현종12년(1671)에 돌아가셨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유래 없는 변란이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심해지는 가운데 서인이 득세한 시기였다. 그의 집안은 대를 이어 벼슬을 한
2. 고산의 생애와 그의 시대
1)양란과 붕당의 격변기
앞서 말했듯이 윤선도는 17세기 전․중엽을 살다 간 인물이었다. 이 시기를 기념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이다. 두 양란은 16세기 후반 이후 차츰 들어나기 시작하던 봉건체제의 틈새와 맞물려 조선을 전기와 후기
고산 윤선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상식적인 정보가 전부이다. 고산이 남긴 여러 작품과 후대에 연구된 업적들을 샅샅이 훑어 윤선도를 내 나름대로 해석해보겠다. 먼저, 그가 자주 접하며 하나의 기준이나 틀로서 그의 정신세계를 자극한 자연을 살펴본다. 고산의 사상적 배경을 아는 데나 저작을
고산구곡가>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제반 배경 사항들과 작품의 구조 분석을 통한 의미 해석을 한 후 두 작품을 대비하여 고찰해 본다.
II. 본론
1. 퇴계 이황, <도산십이곡>
(1) 퇴계 이황의 생애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연산군 7년)~1570년(선조 3))은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경상북도
고산은 조선조 역사에서 한 전환점이 되는 시기를 살아갔다. 곧 임·병 양란을 직접 겪었고 권력 내부의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붕당기를 통과했던 것이다. 그의 삶 역시 그러한 역사의 와중에서 때로는 권력의 정점에 근접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쓰라린 패배를 감수해야 했다.
그는 젊어서는 당대의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