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이는 당시 명과 후금, 모문룡의 문제, 국내 세력 등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여기서는 광해군의 몰락 원인과 대후금정책의 실패를 중심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발발에 대해 논해 보도록 하겠다.
사신을 줄곧 보냈다.
책봉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 자세한 사정은 후금이 알지 못했고 조선과 명나라가 상당히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만 생각하였다. 그리고 광해군 말기부터 가도에 거주하던 모문룡이 요동수복을 하겠다고 날뛰고 있었으니 후금입장에서는 매우 심기가 불편했다.
모문룡이 조선의 가도(평안도 철산 앞바다에 있는 섬)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후금은 크게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 무렵 인조반정에 참여했던 이괄이 자신만이 이등공신에 책봉된 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반정 실패 후 그는 후금으로 도망가 인조반정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모문룡과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적대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던 조선을 침입하여 종묘호란을 일으키고, 항복을 받아 후방의 안정을 꾀했다. 이어 또다른 적 몽골을 침공하여 후방을 더욱 안정히 하였다. 내몽골을 평정하여 링단 칸이 소유하고 있던 원나라의 전국 옥새를 손에 넣게 되는데 이것을 계기로
모문룡은 鐵山 앞의 島에 진을 치고 명과 조선으로부터 식량병기병졸을 공급 받고 후금에 대한 견제작전을 폈다. 이 때부터 丁卯胡亂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후금의 후방지역을 습격하여 내부를 교란시켰을 뿐 아니라 요동반도의 반란민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그들과 밀통하여 반란을 유도함으로써 후금
모문룡의 군대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정벌하였다(1636).
3) 청군의 입관
皇太極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福臨(6歲)이 계위하고 順治라 改元하였으며 多爾袞과 제이합량이 보정하였다. 이후 攝政王 多爾袞(Dorgon, 1612~61)의 도움을 받아 紫禁城의 주인이 된다. 도르곤의 원정
모문룡 부대를 압록강 입구의 가도에 주둔케 하였으나, 조선 측은 그들의 식량을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후금과 친선을 도모하여 중립적인 정책을 취했다. 이러한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왜란 이후 국력이 쇠약해진 조선으로써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④ 인조반정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실리
모문룡이 주둔하고 있어 후금의 배후를 교란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조선에서는 이괄의 난(1624)이 일어났다. 이괄은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웠으나 자신이 2등 공신으로 책봉된 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하기까지 하였다.
관군에게 패하자 주동자중 한명련의 아들 한윤일당은 후금으
지시한 것이었다. 그 후 광해군이 인조반정(1623)으로 쫓겨나고 인조가 왕에 즉위하였다. 인조는 친명배금의 정책을 썼으므로 후금과의 관계는 자연히 나빠졌고 이것은 후금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조선의 서북방에서는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주둔하고 있어 후금의 배후를 교란하고 있었다.
1. 서론
7년간에 걸친 왜란이 끝난 지 30년 만에 또 다시 조선은 북방 후금의 침입을 받았다. 그것은 인조 때의 서인 정권이 명과의 의리를 내세워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 두 사건이 일어나 후금을 자극하였다. 그 하나는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후금을 차지한 요동 지방을 빼앗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