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과 '칠정'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인간의 심리 현상을 분석한 것은 이유가 있다. 더욱이 이러한 분석이 개인의 주관적 독단에 그치지 않고 논쟁을 통해 객관적 사고로 넘어가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것은 특이하다. 사상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 논쟁은 심성론과 이기론의 결합을 처음으로 시도하
퇴계선생은 높은 벼슬자리는 마다하고 낮으면서도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할 수 있는 외직을 주로 원했다. 원래 이황은 원래 높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날리는 것을 꺼려했으며 그의 형이 간신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재야로 물러가 숨을 굳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황이 살다 간 16세기
사단칠정론( 四端七情論 )
배경
고려말 조선초에는 성리학 도입의 시기여서 성리학에 대한 깊은 해석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성종 대(15세기)에 이르러 성격덕의 기철학, 이언적의 리철학으로 성리학의 이론이 분화 체계화된다. 이를 바탕으로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이황, 정지운, 기대승, 이이, 등
Ⅰ. 서론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퇴계는 ‘존천리알인욕(存天理?人慾)을 통한 구인성성(求仁成聖)’이라는 자신의 지향처를 세우고, 이를 이루기 위하여 평생을 노력해 온 인물이다. 그의 거경궁리(居敬窮理)를 위한 노력이나 정좌수련법 등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2) 사림(士林) - 정암(靜菴) 조광조
앞에서 간단히 살펴본 바와 같이 율곡의 개혁사상의 연원은 중국 선유(先儒)의 사상과 『주역(周易)』 등 유가의 주요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개혁사상에 더욱 가까이서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과 사상은 사림파의 등장과 그들의 사상, 특히 정암(靜菴
성리학의 교육관
성리학에서의 교육
자연·우주처럼 성실함은 오직 성인에게만 해당되는 것
나머지 는 그와 같이 되도록 노력해야만 하는 존재들
→ 인간들은 성실하려고 노력하는 것(誠之者)을 삶의 기본자세로 삼아야 하며 이런 자세가 바로 인간의 길(人之道)로 여겨졌던 것이다.
즉, 성실
1. 퇴계의 생애
1) 이황의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
2) 조선시대 중엽(1501~1570)에 활동하던 대표적인 유학자
수학기(修學期) → 유교경전 연구(주자의 『사서집주』를 비롯한 성리서)
사환기(仕宦期) → 벼슬살이(진사 합격 후 성균관에 들어간 이듬해 장원급제)
1. 퇴계의 생애
1) 이황의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
2) 조선시대 중엽(1501~1570)에 활동하던 대표적인 유학자
수학기(修學期) → 유교경전 연구(주자의 『사서집주』를 비롯한 성리서)
사환기(仕宦期) → 벼슬살이(진사 합격 후 성균관에 들어간 이듬해 장원급제)
四端七情之辨]은 어떠한 배경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까? 현상적으로 볼 때 [율곡이씨논사단칠정지변]이 경신환국을 통해 서인에 의해 남인이 정치적 박해를 당하고 있던 시점에 지어졌다는 사실을 당시까지의 그의 정치적 행로와 연관시켜 본다면 그의 율곡 비판은 당시의 정치적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Ⅰ. 개요
갈암은 성리학에 있어서는 철저한 주자학 정통주의 -엄밀히 말하자면 퇴계학의 유일적 정통주의- 의 재흥을 모색하였다. 경세론에 있어서는 당시 성리학자의 비경세유용적인 학문경향을 비판하여 경세적 측면이 강했던 선진유학의 정신을 재건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의 성리학은 순